조지훈 시선 초판본
秋日斷章
1
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
2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北魚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 잔
뜰에 내려 營營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몬지 앉은
古書를 읽다가…
3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芭蕉를 캐어 놓고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 간
激情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어달린
붉은 감 하나
成熟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온다
팔짱 끼고
귀 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초판본 조지훈 시선≫, 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열 살 때 동요를 처음 짓고 ≪파랑새≫ ≪피터팬≫ ≪행복한 왕자≫를 읽던 소년은 한국 시단의 한 봉우리를 이루는 시인이 되었다. 옥고를 치르고 전쟁을 치르고 독재에 맞서며 후학을 가르치던 격정의 세월은 소낙비처럼 스쳐갔으나 끝내 잊힐 수 없는 붉은 시혼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