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함께하는 유럽여행 8.
헝거리 터르버에서 만난 13 시간
역사가 이 마을의 이름을 부른 것은 1299년이었다. 강둑을 따라 걷는 떡갈나무와 느릅나무의 행렬은 14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대 헝가리 최고의 작가 머그더가 바람과 먼지의 기억을 이곳에서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6시45분부터 부다페스트행 밤기차가 떠나는 저녁 8시까지, 그의 그림자를 따라 이 오랜 마을의 길을 걸어보자.
터르버
전차는 신시가지를 다 지나쳤다. 이제 높은 건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진짜 터르버다. 터르버 중에서도 여기가 어누슈커가 태어난 구역이다. 이곳은 그녀가 잘 아는 곳이다. 돌 하나까지도 빼지 않고. 별로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세페시네 가게의 진열장에는 옛날에 쓰던 바로 그 나무 상자에 과자가 놓여 있다. 입에 넣으면 금방 녹던 과자다. 그러나 가게의 옛 상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상표에는 검은 고양이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예뇌의 첫 제자 난디가 그린 것이었다. 네 개의 발은 평면에 새겨지고 다섯 번째 발같이 생긴 꼬리는 그 생김이 이집트의 벽화를 연상케 하는 그런 그림인데 단지 다른 것은 이집트의 벽화에 비해 훨씬 더 흉하고 못생겼다는 점이었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그 대신 새로운 회사의 상표가 걸려 있었다. 소비조합. 그리고 이제 이 회사 이외에 어떤 가게도 이 구역에는 더 없었다. 허이두의 가게가 있던 건물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이발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사무실이었다. 어누슈커는 유리창 건너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빙빙 돌리는 이발소용 의자 두 개가 있었다. 그 의자는 말총머리를 빙 둘렀었는데 그것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벽에 부착되어 있는 유리도 없었다. 언주가 데리고 와서 머리를 자르게 할 때마다 그녀는 그 유리 아래서 무서워 벌벌 떨곤 했다. 허이두의 이발소 안에는 저울이 있고, 그 옆에는 타자기가 있었다. 아마 허이두는 무덤 속에서 아직도 내가 이발 기계와 이발 가위를 보고 무서워 떨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시퍼렇게 반짝이는 면도칼, 나무 상자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고, 아니면 칼집에 잘 접어 넣어 벽에 걸려 있을 칼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무서워할까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녀가 싫어하고 무서워하기까지 했던 것은 창문에 서 있는 샴푸 병이었다. 생긴 것도 이상하게 생겼고 색깔도 노랗게 바랜 그 병이 사실은 무서웠고, 그 사실을 언주만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난번 이곳에 마지막으로 와본 이후 새로 지은 집은 한 채도 없었다. 작은 오두막들은 마구간보다 약간 높다고는 하지만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크게 자란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뛰어놀고 있었다. 아직 가을이어서 간단히 옷을 입었고 맨발로 유리 조각과 돌 조각이 널려 있는 땅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어노는 것이었다. 울타리를 만드느라 세워놓은 말뚝을 기둥 삼아 걸어놓은 빨랫줄 위에는 빨래들이 걸려 있었다. 울긋불긋 빛나는 여러 개의 웃옷과 여러 겹 기운 양말들이었다. 닭들마저도 다 덥수룩하게 야위어 보였다.
검게 색을 칠한 막대기 울타리가 있는 이곳은 그녀가 눈을 감고도 금방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도 마찬가지다. ‘국방군 거리 9번지.’ 어누슈커는 발을 옮기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길모퉁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보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눈이 가는 풍경이 있었다. 무화과 정원 저쪽 너머에 있는 쿠먼의 언덕이었다. 공기가 깨끗해서인지 무척 가깝게 보였다. 거기에 있는 포도나무가 몇 그루나 되는지를 숫자로 셀 수 있을 듯이.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그 언덕에까지 가기로 마음을 정하면 상당히 오랫동안 걸어야 할 것임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가볍고 축축하고, 그러나 약간은 매서운 감이 도는 바람이었다. 이 지역에서 늘 부는 독특한 바람이었다. 여기서 티서 강까지는 1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오면 바람과 함께 그 강의 냄새도 이곳까지 실려 왔다.
<<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26~27쪽, 3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