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임화 시선
이형권이 엮은 ≪초판본 임화 시선≫
1929년, 노동의 깊은 밤
연거푸 궐련 세 개비를 말아 문 뒤 오빠는 떠났다. 강철 가슴속에 위대한 결정과 성스런 각오. 어린 동생이 깨진 거북무늬 질화로를 바라본다. 우리 집은 어디 있을까?
사랑하는 우리 옵바 어적게 그만 그러케 위하시든 옵바의 거북紋이 질火爐가 깨여젓서요
언제나 옵바가 우리들의 ‘피오니ㄹ’ 족으만 旗手라 부르는 永男이가
地球에 해가 비친 하로의 모−든 時間을 담배의 毒氣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紋이 火爐가 깨여젓서요
그리하야 지금은 火적가락만이 불상한 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옵바를 일흔 男妹와 가치 외롭게 壁에 가 나란히 걸렷서요
옵바…
저는요 저는요 잘 알엇서요
웨− 그날 옵바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드러가실 그날 밤에
연겁히 말는 卷煙을 세 개식이나 피우시고 게셧는지
저는요 잘 아럿세요 옵바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옵바가 工場에서 도라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옵바 몸에서 新聞紙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골에 피곤한 우슴을 우스시며
…네 몸에선 누에똥내가 나지 안니− 하시든 世上에 偉大하고 勇敢한 우리 옵바가 웨 그날만
말 한마듸 없시 담배 煙氣로 房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勇敢한 옵바의 마음을 저는 잘 알엇세요
天穽을 向하야 긔여 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옵바의 鋼鐵 가슴속에 백힌 偉大한 決定과 聖스러운 覺悟를 저는 分明히 보앗세요
그리하야 제가 永男이의 버선 한아도 채 못 기엇슬 동안에
門지방을 때리는 쇠ㅅ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안으섯서요
<우리 옵바와 화로(火爐)>, ≪초판본 임화 시선≫, 이형권 엮음, 17~21쪽
카프의 노동 시인가?
노동 시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사상성과 형상성이 조화를 이루었다.소재가 노동운동이어서 그런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는 사상만 앞서기 쉽다. 이 시는 “화로”와 “부젓가락”이라는 상징적 매개를 통해 구체성과 예술성을 획득했다. 오누이 사이의 애틋한 마음과 노동운동의 열정이 결합하면서 서정성과 이념을 동시에 보여 준다.임화는 누구인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돌올하게 빛나는 각별한 개성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 운동가, 영화인, 출판인, 혁명가였다.
카프 시인들 가운데 발군이라는 찬사는 합당한가?
서정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시를 창작해 카프 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26년부터 창작된 그의 시들은 이전 시에서 보이는 관념적 폭로성과 구호조 수사를 극복했다. 그는 계급주의 사상을 기조로 한 정치적 신념을 감동적인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임화의 시는 무엇을 했는가?
식민화와 현대화가 중첩되는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성찰,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 인민 대중에 대한 사회주의 사상 계몽이 그의 업적이다.
그의 시가 겪는 세 번의 변화란 어떤 것인가?
1926년부터 1935년, 카프 해산 이전까지가 초기 시다. 이 시기를 지배한 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다.
등단 초창기에는 다르지 않았나?
잠시 내면적 자기 성찰과 다다이즘적 실험 정신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서정소시>, <향수>, <설(雪)>, <화가의 시>, <지구와 ‘빡테리아’> 등이 그것이다.
초기 시편은 어떤 것들인가?
일제 치하의 폭압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당시 사회 현실이 시인의 내면세계만을 추구하거나 실험 정신에 침잠하는 시를 용인치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曇) ― 1927(一九二七)>에서 비롯된 계급주의 시학은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옵바와 화로>, <우산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카프 해산 이후 광복 이전까지가 중기인가?
이 시기에는 초기 시에서 보이던 유물론적 세계관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두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는 <세월>, <해협의 로맨티시즘>, <홍수 뒤>에서 볼 수 있는 낭만적 세계관이나 향수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바다의 찬가>, <통곡>, <자고 새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암흑기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각이다. 현실 비판의 강도가 현격히 약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임화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 약해진 것인가?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카프 맹원들에 대한 두 차례의 검거 선풍이 더 큰 요인일 것이다. 임화는 세계문학사에서도 흔치 않은 복자(伏字)의 시대에 시를 썼다. 일제의 철저한 검열과 탄압 아래서 최소한의 문학 행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제 변모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후기는 1945년 광복 이후인가?
그렇다. 광복과 전쟁 속에서도 현장의 느낌을 충실히 남겼다.
1947년에 월북하는가?
북한에서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인민군 종군작가단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
후기 시는 어디로 갔나?
두 방향의 시적 지향점을 갖는다. 하나는 <9월 12일>, <계관시인>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광복 직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유의지나 혼란스런 시대에 대한 비판 정신이다. 다른 하나는 <서울>,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서 보이듯이 6·25전쟁과 관련된 비극적 정서나 당파적 승전 욕망이다.
승전 욕망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현실 비판의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선무 방송 문구와 같은 교조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같은 작품은 이산가족의 비극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전쟁시의 투박성과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숙청 사유가 뭔가?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다.
현재 임화는 어디에 있나?
그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살다 간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불과 45년밖에 되지 않는 삶의 여정에서 어느 한순간도 평화로운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자신이 신봉하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월북했지만 거기서 그가 만난 것은 정치적 음모에 의한 잔인한 처형이었다.
평가는 올바른가?
그의 비극적 죽음만큼이나 문제적이다. 처형 이후 아직까지도 북한에서는 정치적·문학적 압살 상태에 놓여 있다. 문학사류에 언급이 전혀 없거나 간혹 문학사의 한 귀퉁이에 언급된다고 해도 반동 문학자의 전형으로 기록되고 있다.
남한에서 임화의 사정은 어떤가?
1980년대 후반까지 좌익 문인으로 폄하되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다행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형권이다.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