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명품 책의 탄생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은 각 작품의 분량이 대하소설에 육박할 정도로 장대하다. 이 대작들의 번역 역시 치열한 작업이다. 한 사람이 4대 장편을 다 번역한 사례가 세계적으로 드물고, 한국에서는 유일무이하다. 4대 장편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서로 잇닿아 있다. 고유한 문체 역시 각기 다른 사람의 작업으로는 일관된 결을 살리기 어렵다. 한 사람의 번역이 필요한 이유다. 국내 최초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번역 도전에 작가를 향한 애정과 열의로 뭉친 김정아 역자가 도전한다. 백 년 갈 번역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국내에 소개하고, 그에 걸맞은 옷을 입히고자 한 출판사의 제안이었다. 그 첫 책 ≪죄와 벌≫ 가죽장정 한정판 100권이 2020년 12월 선보였고 출시 열흘 만에 매진되었다. 그만큼 이 시리즈가 소장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방증이다. 이제 그 두 번째 책으로, 작가가 자신의 창작 중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고 말한 작품 ≪백치≫를 선보인다. 번역자 역시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중 이 작품에 가장 애정이 간다고 한다. 역자는 그간 출간된 번역본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번역해 냈다.
도스토옙스키 같은 천재 작가의 언어는 풍부하고 아름답고 충만한 언어다. 그것을 원어가 가진 힘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곱씹고 또 곱씹어서 최대한 가깝게 한글로 옮겨 내려 노력했다.
한정판 시리즈는 백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순수 가죽 장정 하드커버로 만든 명품 책이다. 순수 가죽의 특성상 대부분의 공정은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진행되었다. 고급 가죽을 고르고, 얇게 밀고, 손으로 일일이 접고 풀칠해서 하드커버를 만들고, 하나하나 손으로 붙이다시피 제본을 한 책이다. 첫 번째 책 ≪죄와 벌≫이 매진되고도 한참 동안 판매 문의가 이어졌을 정도로 소장 가치가 높은 시리즈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다.
치정, 살인, 돈, 사랑, 욕망, 질투의 삼각관계 속에 철학을 담다
≪백치≫는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을 잇는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는 소설가, 심리 분석가, 철학가, 예언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치정, 살인, 돈, 사랑과 욕망과 질투의 삼각관계… 흥미진진한 관계와 사건 속에 작가의 철학이 녹아 있다.
토츠키는 보호자인 양 자신이 거두어들인 고아 나스타시야를 키워 첩으로 삼고는 필요 없어지자 돈 7만5000루블을 얹어 팔아 버리려 하며, 예판친 장군은 연줄 많고 돈 많은 자기 연배의 토츠키를 자신의 딸 아델라이다와 결혼시키려 한다. 오만방자하고 방탕한 겉모습의 여인 나스타시야는 미시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7만5000루블을 위해 “더러운 여자” 나스타시야를 아내로 맞으려 했던 인물에게는 불 속에 던져 넣은 돈을 맨손으로 꺼내면 다 주겠다는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런 세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신과 인간, 파멸과 구원 등의 철학적 사상을 버무려 내어 시공을 뛰어넘는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이 존재한다. 그의 테마는 직설적인 시대 비판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녹여 내고 있다. 언제나 돈과 시간에 쫓겨 기일을 맞추기 위해 서두르며 글을 써 내려갔지만, 작가의 천재성은 이 작품을 장르적 기법으로 빈틈없이 아귀가 맞는 완벽한 장편으로 태어나게끔 했다. 하나의 인물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의 개인적 체험 속에 시대의 여성 문제를 녹여 내고 있으며, 사회 문제에 대한 지적뿐만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존심 강한 여성의 심리적 문제 및 구원과 파멸이라는 거대 철학의 문제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부차적 인물들 역시 위트나 유머의 원천이며 무거운 작품에 활력을 주기도 하나, 그것은 때로 우스움에서 그치지 않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철학적인 주요 테마가 그들의 입을 통해 언급되기도 한다. 레베데프의 묵시록 해석이 그러하고, 이폴리트의 자연법칙과 자유의지의 테마가 그러하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 테마들이다.
주검 위에 세워진 환상적인 무덤의 도시, 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가 ≪백치≫를 집필하던 1860년대 후반의 러시아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유럽식 자본주의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가장 먼저 가장 높은 파고를 타고 밀려들었다. 서구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우려를 나타내면서 러시아적 전통과 문화, 믿음 등을 수호하는 슬라브주의자들에게 페테르부르크는 늪을 메워 그 위에 세워진, 매우 부자연스럽고 인공적이며 부정적인 공간이다. 도스토옙스키를 포함한 많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 속에서 페테르부르크는 악마적 공간이며, 삶이 질식당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 도시를 짓느라 수많은 농노들이 죽어 가, 돌이 아닌 농노들의 뼈가 도시의 기초가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곳에 실체도 없는 거액의 돈이 뭉텅이로 오가는 증권 거래소도 생겨났으며, 그 덕에 많은 수의 졸부와 파산자가 양산되었다. 유럽 자본주의 국가에서와 같이 빈익빈 부익부의 양상은 더욱 심해져 갔다. 사랑, 결혼, 가족, 영혼의 평화, 그리고 영혼을 가진 사람 등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매매되는 세상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이 모든 것이 세상의 끝을 알리는 종말론적 징후였다.
미가 세상을 구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미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명제를 두고 “긍정적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을 그려 내고자” 했다. 한 편지에서 작가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작업이었으므로 그것이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준비할 수가 없었던” 테마였다. 그 인물의 현신이 미시킨 공작이다.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답고 강렬한 영혼의 소유자이나 간질 환자에 백치이고, 우스꽝스러우나 무서우리만큼 날카롭게 핵심을 보고 늘 진리를 말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미시킨을 창조할 때 염두에 둔 모델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였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인 성경 속 예수가 그의 시대에 가장 흉포한 죄인으로 몰렸던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아름다운 인간”도 페테르부르크라는 세계에서 “백치”로 여겨진다. 인간으로서의 미시킨 공작은 아글라야를 연정으로 사랑하지만, 자신이 “연민”을 품은 나스타시야 곁에 남는 길을 선택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불쌍히 여김”, 즉 연민이다. 인간의 육체를 지닌 신 그리스도와 같이 그는 연민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파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200자평
이 책은 지식을만드는지식의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한정판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딱 150권만 만든다. 첫 책은 ≪죄와 벌≫로 2020년 12월 100권이 출간되어 열흘 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백 년 갈 번역을 선보이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시리즈답게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은 제대로 된 번역을 선보인다. 또 백 년 갈 번역에 걸맞게 백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순수 가죽 장정 하드커버로 만들었다. 표지와 케이스에는 24K 금박 문양을 찍었고, 책의 3면에는 금장을 입혔다. 모든 책에는 1~150까지 고유 번호를 새겼다.
지은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구력)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고,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생활을 보낸다. 그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옮긴이
김정아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서울대학교 박사 과정 중 미국으로 유학 가서, 일리노이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ᐨChampaign)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전공으로는 폴란드 문학을 공부했다. 박사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와 상징>이며, 다수의 소논문을 국내외 언론에 발표했고, 서울대학교 등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박사≫ ≪학대받고 모욕받은 사람들≫ ≪미성년≫ ≪온순한 여자/우스운 사람의 꿈≫(이상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다닐 하름스), ≪부실한 컨테이너≫(미하일 조셴코), ≪되찾은 젊음≫(미하일 조셴코), ≪카람진 단편집≫(니콜라이 카람진), ≪무엇을 할 것인가?≫(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등의 역서와 ≪패션 MD1 : 바잉편≫, ≪패션 MD2 : 브랜드편≫, ≪패션 MD3 : 쇼룸편≫, ≪모칠라 스토리≫ 등의 저서가 있다. 오디오북 ≪백 인의 배우 세계문학을 읽다≫에 <코>(니콜라이 고골), <우스운 사람의 꿈>(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역자로 참여했다. 20세기 소비에트 문학과 소비에트 여성의 문제, 그리고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으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소비에트 시기 문학 작품의 번역을 준비하고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앞으로 백 년 갈,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번역하고 있다. ≪죄와 벌≫(2020년 출간), ≪백치≫(2021년 출간), ≪악령≫(출간 예정),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출간 예정)
차례
주요 등장인물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공작은 자신의 간질 상태에는 발작 직전에 일어나는 하나의 단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발작이 실제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난다면 말이다) 발작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는 우수와 정신적인 암흑과 압박감 가운데서 돌연 뇌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듯 활기를 띠고, 비상한 파열을 일으키며 그의 안에 있는 삶의 힘이 일시에 팽팽히 긴장된다. 이 순간에는 삶의 감각과 자기의식이 거의 열 배로 커지지만, 그러한 것은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진기한 빛으로 밝아지고, 걱정 근심과 의심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밝은 환희와 충만한 지혜가 최종적인 원인들의 최고 형태인 신성한 평안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순간, 이 눈부신 광휘는 단지 발작이 시작하기 직전의 마지막 1초(절대로 1초를 넘지 않는다)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자네의 씨앗을 뿌리고, 자네의 ‘자선’을 뿌리고, 자네의 선행을 뿌리면서 자네는 자네 개성의 일부를 내주고, 자네 안에 타인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걸세. 자네는 서로서로 상호적으로 참여하는 걸세.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네는 지식과 전혀 기대치도 않던 발견으로 보상을 받게 될 걸세. 결국 자네는 자네의 행위를 과학을 바라보듯 보게 될 것이 분명하네. 과학은 평생 동안 자네를 사로잡아 자네의 삶 전체를 가득 채울 걸세. 한편 자네의 모든 사상, 자네가 뿌린 씨앗들은 어쩌면 자네에게서 이미 잊혔을지도 모르지만,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날 걸세. 자네에게서 씨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테니까. 그러니 미래의 인간의 운명을 해결하는 데 자네가 어떤 역할을 할지 어떻게 알겠나?
그녀는 아무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특히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거나, 그런 감정이 정말 심각한 것임을 믿는 것은, 토츠키 같은 회의론자나 세속적인 냉소주의자에게는 정말 많은 지혜와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는 무자비할 정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이 사람을 욕되게 할 수만 있다면, 시베리아로 가건 징역을 살게 되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절히 철저하게 자신을 파괴시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