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세티 시선
윤명옥이 옮긴 <<로세티 시선(Selected Poems of Christina Rossetti)>>
빅토리아 여성의 일탈 전략
그들은 어머니이자 아내였고 체념과 순종으로 남편을 위로한다. 그들은 가정의 천사였지만,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면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제 눈은 밝아지고 귀는 엷어지며 입은 자유롭다. 죽음 앞에서 누가 인간에게 천사를 찾겠는가?
어느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하나의 얼굴이 그의 모든 캔버스로부터 밖을 내다보고 있네.
똑같이 생긴 하나의 모습이 각각의 캔버스에 앉거나 걷거나 기대어 있네.
그녀는 그 캔버스들 바로 뒤에 숨어 있었다네.
거울이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든 모습을 비춰 주었다네.
오팔이나 루비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여왕,
가장 신선한 여름의 신록을 걸친 이름 모를 소녀,
성녀, 천사.− 모든 캔버스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가지 똑같은 의미를 표현하고 있네.
그는 밤이고 낮이고 그녀의 얼굴을 먹고 살고,
진실로 착한 눈을 가진 그녀는 돌아서서
달처럼 아름답고 빛처럼 즐겁게 그를 본다네.
기다림으로 이지러지지도 않고, 슬픔으로 흐릿해지지도 않은 채,
실재가 아닌 그녀는 희망이 밝게 빛날 때처럼 있었고,
실재가 아닌 그녀는 그의 꿈을 채워 주고 있다네.
≪로세티 시선≫, 크리스티나 로세티 지음, 윤명옥 옮김, 162∼163
누구의, 아니 무엇의 시선인가?
화가의 시각일 거라는 상식을 버리고 그림 속 인물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 로세티의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이다. 당시 사회, 즉 남성을 대표하는 화가의 시각이 아니라, 그 화가를 바라보는 타자, 즉 여성을 대표하는 모델의 시각을 제시한다. 새로운 시 읽기를 즐길 수 있다.
작품 속의 “그”는 누구인가?
시인의 오빠 단테 가브리엘이다. 라파엘로 이전의 소박하고 사실적인 르네상스 예술을 추구했다. 라파엘 전파를 결성하고 이끈 화가이자 시인이다.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라파엘 전파의 그림 모델이었고 그 기관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남성 예술가가 주도하는 예술 세계의 모델이라는 독특한 경험은 로세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여성 예술가로서 주체성을 강화했다. 모델로 설 때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만을 보이지 않는다. 창백하거나 우울하거나 병적이거나 염세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 고정된 여성의 모습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성의 고정 관념에 반항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은밀히 드러냈다.
오빠 단테의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큰오빠뿐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술가였다. 부친은 이탈리아에서 런던으로 정치 망명한 유명한 시인 가브리엘레 로세티였고, 모친은 바이런과 셸리의 친구이자 작가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동생이었다. 작은 오빠 윌리엄 마이클과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는 작가다.
1862년 첫 시집 ≪고블린 시장과 기타 시들(Goblin Market and Other Poems)≫에 대한 평가는?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계승자로 지목되었고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환상시, 동시, 종교시, 설교문, 논설문에 재주를 보였다. 홉킨스, 스윈번, 테니슨도 찬사를 보냈다. 테니슨을 이을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란 어떤 존재였나?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 희생을 통해 종속적인 존재로 정의되었다. 어머니이자 아내였고 ‘가정의 천사’로 체념과 순종을 미덕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으며 밖에서 활동하는 남성을 위로하는 인간이었다.
당대 여성 시인은 무엇을 썼나?
경건함을 기본으로 가정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거나 이런 주제들로 작품을 구성하도록 제한되었다. 여성적인 덕목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하고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순종과 체념의 미학, 사랑에 대한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만을 쓰도록 주문받았던 셈이다
로세티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겉으로 보기에 여성의 미덕을 보여 주는 듯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당대에 대한 은밀한 반항, 관념적 일탈을 통해 시적 주체성을 확립한다.
고통, 죽음, 인내, 체념으로 변장한 것인가?
그것을 마스크로 이용해 판타지와 알레고리를 사용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엿보거나 그림 속의 모델이 화가를 엿본다. 생각하지 못했던 전도되고 전복된 시각을 구사한다. 작품을 통해 다양한 죽음의 언어를 살펴보고 전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여성적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부정되고 금기시되다시피 한 죽음을 시로 쓰는 것은 어떤 전략인가?
‘여류 시인은 여성답고 사랑스런 시를 써야 한다’는 당대의 규범에 대한 저항이었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자신의 우울한 내면과 염세적 사고방식, 삶의 우울성,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 종교적 헌신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죽음은 로세티와 어떤 관계인가?
모든 유한한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종착역이다. 특히 그녀가 체험한 삶과 그로 인한 독특한 기질은 다양한 죽음의 언어를 통해 중요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의 로맨스를 꽃피우며 사랑시를 주로 쓴 것에 비해 로세티는 연애를 세 번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산다. 어린 시절부터 신경 쇠약, 우울증에 시달렸고 만년에는 그레이브스병, 유방암 등으로 고생했다. 삶은 고통이었다. 현세를 부정하고 인생무상을 노래한다.
현세의 아름다움과 삶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에서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인가?
지상 세계가 보여 주는 순간적인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보고 그 안에 내재된 허망함도 본다. 천상의 세계도 늘 밝은 빛으로 충만한 곳만은 아니다. 세상의 이중적인 양상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상과 천상, 이승과 저승 모두를 아우른다. 모든 사물과 장소, 존재에 깃들어 있는 양면을 제대로 보고 있는 시인이다.
세상의 객관화인가?
대상을, 그것이 비록 자신의 자아가 관련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파악했다.
같은 시대의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하면?
남성 시인만이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던 시대에 여성 시인으로서 여성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감성이 풍부하고 시적 주제나 기법 면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디킨슨에 비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로세티는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동요시부터 고차원적 기법을 구사하는 시까지 상당히 폭넓은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초보 독자나 고급 독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이 복잡한 시를 어떻게 읽는 것이 좋겠는가?
우선 시 그대로의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느낌을 맛보고, 그다음에 시적 기법의 묘미를 느껴라. 오늘날이 아니라 로세티 당대의 상황이나 여건을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즐거움이 더욱 커질 것이다. 초보 독자라면 뒷부분에 실린 동요시를 먼저 읽어라. 단순하고 새로운 시적 감성을 체험한 후에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오면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명옥이다. 허난설헌 번역문학상, 세계우수시인상, 세계계관시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