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거역설 계사전
장윤수가 옮긴 장재의 ≪횡거역설 계사전(橫渠易說 繫辭傳)≫
나와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나의 원리가 있다. 신이다. 다양한 현상이 있다. 화다. 만물은 흩어져 아무것도 없는 태허가 되고 그것은 다시 움직여 만물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왜 움직이는 것일까? 나는 왜 나일까? ≪주역≫은 우주론일까? 세계관일까?
“신묘함을 궁구하고 조화를 알게 되면” 하늘과 더불어 하나가 되니 이런 일이 어찌 내가 힘써서 될 수 있겠는가? 곧 덕이 성해져서 저절로 이루어질 따름이다.
窮神知化, 與天爲一, 豈有我所能勉哉? 乃德盛而自致爾.
≪횡거역설 계사전≫, 장재 지음, 장윤수 옮김, 133쪽.
궁신지화가 ≪횡거역설≫의 핵심 주제인가?
신(神)과 화(化)는 장재 기론(氣論)의 중요 개념이다. 그는 통일성의 원리인 ‘신’과 다양성의 원리인 ‘화’로 기의 운동 원리를 설명한다. 통일성의 원리는 만물이 흩어져 무형의 우주 공간인 태허가 되는 것이고, 다양성의 원리는 태허가 모여서 다시 만물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은 ‘태허−기−만물’의 유기적 관계를 보장하는 기 운동의 원리와 근거이며, 화는 신을 속성으로 하는 기 운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으로서 현상계의 운동과 변화의 원리다.
이것은 어떤 책인가?
횡거 선생이라 불린 장재가 ≪주역≫을 풀이한 책이다.
장재는 누구인가?
중국 북송의 철학자다. 주돈이, 소옹, 정호, 정이와 더불어 북송오자 곧 북송의 다섯 선생으로 불리며 존숭받는 인물이다.
그가 젊은 시절 군사학에 관심을 둔 까닭은?
중국 서북부 지역의 서하는 북송을 여러 차례 침략했다. 장재는 서하 인접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군사학에 관심을 갖고 병법을 배우게 되었다.
병법에서 유학으로, 그의 관심이 바뀐 계기는?
범중엄의 충고 때문이다. 이름난 학자이자 고위 관료였는데 서하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21세이던 장재는 서하의 점령지를 수복하여 공명을 세우고자 그에게 글을 올렸다. 장재의 비범함을 알아챈 범중엄은 ≪중용≫을 읽도록 권했으며, 병법이 아닌 유학에 힘쓸 것을 권장했다. 장재는 ≪중용≫과 유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불가와 도가 연구에 탐닉했던 이유는?
≪중용≫을 읽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 뒤 수년간 불가와 도가 사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여기서도 성취감을 얻지 못했다. 유가 경전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 육경, 특히 ≪주역≫에서 답을 얻는다.
북송의 시대 상황이 장재를 ≪주역≫으로 이끈 것인가?
당시 북송은 문인들이 조정을 장악했기 때문에 전통 학문과 문화·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은 불교와 도교 사상이 지닌 형이상학적 이론에 몰두했으며 민중은 그것을 민간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자들은 불교와 도교를 내세만 추구하는 속임수라고 단정하고 타파하려 했다.
장재는 어떻게 ≪중용≫과 ≪주역≫의 길을 걷게 되는가?
그는 유학이 한대 이후 외왕(外王)에만 지나치게 치중해 왔다고 생각했다. 내성(內聖)을 보완하기 위해 고심했다. 전통 유가 철학의 철학화와 형이상학화에 골몰한 것이다. 유가 경전 가운데 형이상학적 기초가 튼튼한 ≪중용≫과,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를 담은 ≪주역≫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장재의 ≪주역≫ 풀이는 어떤 점에서 뛰어난가?
장재의 학문 여정은 ≪중용≫에서 시작해 육경에서 끝난다. 육경 공부의 중심은 당연히 ≪주역≫이므로 ≪송사(宋史)≫에서는 “장재의 학문이 ≪주역≫을 근본[宗]으로 삼았다”라고 평했다. 장재 사상의 해석자로서 가장 유명한 왕부지도 “장재의 학문은 역학 아닌 것이 없으며, 그의 말 또한 역학 아닌 것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장재 사상의 핵심은 ≪주역≫ 풀이다. 그는 ≪주역≫을 풀이하는 데 유가 경전을 비롯해 불가와 도가 사상의 지식까지 총망라해서 합리적이고 폭넓은 세계관을 보여 주었다.
역학을 이해하는 장재의 기본 관점은 무엇인가?
≪주역≫에 미래를 예측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점을 쳐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음양 변역의 도(道), 곧 사물의 변화와 발전의 법칙을 가리킨다.
장재 역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장재는 원기(元氣)와 음양 이기(二氣)를 가지고 역리를 풀이해 온 한·당 이래의 역학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따라서 ‘유생어무(有生於無)’ 곧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는 도가의 입장과, 도가 학설에 따라 ≪주역≫의 원리를 해석하는 데 반대했다. 이러한 기론적(氣論的) 역학관으로부터 기학파(氣學派)의 역학이 시작되었다.
장재의 기론적 역학관은 정이의 이론적 역학관과 어떤 차이를 보이나?
정이와 장재의 철학 사상을 대조해 설명할 수 있다. 정이와 장재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최대 분기점은 ‘이(理)’와 ‘기(氣)’다. 정이는 천리(天理)를, 장재는 기(氣)를 자신의 철학 사상에서 최고 개념으로 삼았다. 정이는 “이(理)가 있으면 기(氣)가 있다”, “이(理)가 있은 후에야 상(象)이 있다”라는 이론적(理論的) 역학관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재는 “기(氣)가 있으면 상(象)이 있다”, “기(氣)의 생성 작용이 곧 도(道)이고 역(易)이다”라는 기론적 역학관을 피력했다.
≪횡거역설≫은 역학사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장재는 왕필의 의리역과 공영달이 <소(疏)>에서 강조한 상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더 나아가 한대의 전통 역학과 정이의 이론까지 일정 부분 소화했다. 장재의 역학 사상은 우주 본체, 사물의 발전·변화의 동인과 관련해 진일보한 합리적 이론 체계를 구축해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명·청 교체기의 저명한 철학자 왕부지가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동아시아 기(氣) 철학 사상의 가장 중요한 모범이다.
왕필의 의리역은 무엇인가?
왕필은 ≪주역≫ 주석서인 ≪주역주≫에서 점(占) 무용론을 피력했다. 이전 ≪주역≫ 연구자 대부분은 괘와 효의 상(象)과 수(數)를 가지고 길흉을 예단했던 반면, 그는 “뜻을 얻으면 상을 잊어버린다”라고 하며 우주 변화의 참뜻을 이해하면 상과 수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후대 학자들은 ≪주역≫에 대한 왕필 이전의 해석을 상수역이라 하고, 왕필의 해석을 의리역이라 했다.
공영달의 <소>는 무엇인가?
당나라 태종이 공영달에게 편찬을 명령한 ≪오경정의≫ 가운데 ≪주역정의≫를 가리킨다. 그는 왕필과 한강백의 ≪주역≫ 주를 채택해 다시 한 구절씩 풀이했다. 공영달은 왕필의 의리역을 따르면서도 상의 개념을 강조하며 두 입장을 결합했다. 곧 그는 상의 개념을 낮게 평가하던 왕필 학파의 편견을 바로잡고자 “한 가지 예로만 구해서도 안 되고, 한 가지 부류로만 취해서도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장재 역학과 ≪횡거역설≫에 대한 연구가 눈에 띄지 않는 까닭은?
정이와 주희 계열의 ‘정통’ 주자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학문 풍토가 뿌리 깊다. ≪정몽≫을 중심으로 한 장재의 기 철학 사상은 어느 정도 연구하지만, ≪횡거역설≫을 중심으로 한 역학 사상은 거의 연구하지 않는다.
≪횡거역설≫의 구성은 어떠한가?
≪주역≫의 편제에 따라 풀이한 <상경(上經)>·<하경(下經)>·<계사상전(繫辭上傳)>·<계사하전(繫辭下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이 있다.
왜 <계사전>만을 옮겼나?
≪횡거역설≫의 핵심이다. 장재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특징적인 이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사전>에서 시작해야 한다. 장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사전>은 역도(易道)를 논했다. 역도를 알면 역상(易象)은 그 속에 있기에 ≪주역≫을 볼 때 반드시 <계사전>에서 말미암아야 한다.”
역도를 알면 역상은 그 속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역도는 ≪주역≫의 도이고, 역상은 괘의 상이다. 전자는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이고, 후자는 수(數)와 함께 ≪주역≫을 해석하는 중요한 계기다. 따라서 도를 먼저 구해야만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장윤수다.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