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정지용 시선
이상숙이 엮은 <<초판본 정지용 시선>>
고요와 고독의 소리
장작불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순이 돋는 소리가 들린다. 흙냄새 피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이 떨어지거나 다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산중, 오래 산 사람은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
忍冬茶
老主人의 膓壁에
無時로 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지여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風雪소리에 잠착하다.
山中에 冊曆도 없이
三冬이 하이얗다.
≪초판본 정지용 시선≫, 이상숙 엮음, 155쪽
너무나 고요한데, 무릇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것인가?
장작불은 덩그렇고 쓸쓸하게 피어 있다. 그늘에 놓아 둔 무에 순이 나오는 것이 눈에 띌 정도로 평온하고, 풍경 소리만 나도 귀 기울일 정도로 산중의 겨울은 그저 조용하다. 시에 드러난 고요와 고독의 풍경은 단순히 눈 내린 산에 사는 노인의 겨울나기만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인동차를 마시는 노주인에게 겨울은 무엇인가?
견인(堅忍)을 이끌어 내는 고독과 단절의 시공간이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뭘하고 있는 것일까?
당시(唐詩) <답인(答人)>의 “산중무일력(山中無日曆)”에서 인용한 구절인 듯하다. 삼동(三冬), 겨울 내내 하얗게 지내는 산중의 공간에 달력과 같은 속세의 시간이 틈입할 수 없다. 고독과 견인의 정신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정지용의 모더니즘은 어떤 모더니즘인가?
초기 시편에서 볼 수 있는 청신한 시어, 감각적 이미지, 낭만적 애수 등은 당시 모더니즘 시의 대표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지용의 그것은 매우 세련되고 독창적이었다. 그의 모더니즘은 ‘언어’, ‘이미지’ 그 자체다.
정지용은 누구인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1930~1940년대 모더니즘의 감수성과 토속 정서를 드러내는 작품을 남겼다. 박용철, 김영랑 등과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하고 김기림, 이태준 등과 ‘구인회’ 활동을 했으며, 당대 최고 문예지인 ≪문장≫의 추천 위원도 지냈다.
그가 사망한 것은 확실한 사실인가?
한국전쟁의 혼란 중 북한군에 납치되었다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설과 납북 과정에서 포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모두 증거가 부족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누가 그의 영향을 받았나?
이상,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가 정지용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김기림은 “우리의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 박용철은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라고 그를 평했다.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의 경향은?
<유리창>, <해협>에서 보듯 청신한 이미지와 언어로 표현되는 현대 감각이 강하다.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시편, 토속 정서와 순수 서정을 보여 주는 시편, 동화의 상상을 보이는 동시도 있다. 다채로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서 어떤 변화가 감지되나?
산수(山水) 자연에 깃든 정신과 절제된 미학을 보여 준다. <장수산>, <백록담>, <옥류동>, <폭포>는 전통 서정과 동양 정신의 미학적 깊이를 보여 주는 명편이다.
≪지용시선≫은 정지용이 스스로 편집한 시집인가?
앞서 발간한 두 시집에서 25편을 스스로 골랐다. 첫 시집에서는 감각적 이미지와 언어의 조탁을 보여 주는 시들과 가톨릭 시 14편을, 두 번째 시집에서는 동양 정신과 절제의 미학을 보여 주는 산수시 11편을 골랐다.
그의 시에서 동양 정신이 어떻게 드러나나?
≪백록담≫의 시편들을 보자. 산수(山水)의 등장, ≪시경(詩經)≫ 구절의 출현을 만날 수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정경교융(情景交融) 같은 한시 창작 방법이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모더니즘에서 동양정신으로의 선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시인의 자의식이 산수(山水)에로의 은거를 유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담백한 형식과 어조로 정신의 경지를 표현했다는 점도 적극적인 해석을 요한다. 최동호는 정지용의 산수시가 은일(隱逸)의 정신을 구현한다고 말했는데 매우 적절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상숙이다. 가천대학교 글로벌교양학부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