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
가을행
가을 아침 문득/ 손수건 한 장으로 길을 나선다/ 아무 준비 없는 길 떠남이/ 이토록 가슴 설레임은 무엇일까.// 모르는 얼굴들 틈에서 두리번거리며/ 쫓겨 가는 사람 모양 서글픔을 안고/ 다음 열차를 기다려 개찰구 앞에 서면/ 제법 감도는 인생에의 비장감,/ 누구에게 결별을 고하지 않았어도/ 나의 애틋한 마음 허공에 운다.// 인간의 고독한 삶이여, 줄줄이 매달린/ 온갖 속연들, 마누라와 자식과/ 제자와 직장의 동료와 여러 친척들,/ 그들의 눈빛은 오히려 선하기만 하거니/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차표 위에는/ 유언처럼 슬픈 내일의 이정표가 흐른다.// 다시 오지 못할 길일지라도/ 후회하지 말라 가을바람은 소슬하고/내 피에 섞인 역마성은/ 먼 하늘의 흰 구름을 손짓해 부른다.// 떠남을 재촉하는 철 맞은 코스모스야/ 너마저 방랑을 유혹하는 아침,/ 시를 버리지 못함도 정녕 하나의 형벌이거니/ 단벌옷으로 떠나는 이 아침에도/ 나의 목적지는 아직도 정해 있지 않다.
≪문병란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 132~135쪽
문득, 떠나고 싶다.
왜?
어디로?
방랑을 유혹하는 가을 아침,
그런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