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선 초판본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 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 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인이 되어라…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나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초판본 고정희 시선≫, 282~284쪽
고정희는 시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라고 정의한다.
결연한 의식과 애연한 서정으로
한국 여성시의 영토를 확장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그의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