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고정희 시선
프라하의 봄1
고정희
수유리에
서늘한 산철쭉이 피었다 진 후
무서운 기다림으로
산은 깊어지네
무서운 설램으로
숲은 피어나네
핏물 든 젊음의 상복으로
아카시아 흰 꽃이 온 산을 뒤덮은 후 뜨겁고 암담한
우리들의 희망 위에
몇 트럭의 페퍼포그와 최루탄이 뿌려지네
외로운 코뿔소들이 그 위를 행진하네
오 나의 봄은 이렇게 가도 되는 것일까
하늘에 칼을 대는 산바람 속에서 긴긴 봄날, 띵까띵까
서울의 백성들은 가무를 즐기고
쓸쓸히 목을 꺾은 젊은이의 무덤에
넋을 달래는 진혼제가 올려진 후
나는 생각하네, 친구여
한 나라의 자유를 위한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복종이기에
간을 적셔 쓴 몇 줄의 시로는 나
구원받지 못하리라 예감하네
더운 목숨의 외로움 탓으로
칼이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언어와
끈질긴 목숨의 죄 때문에
훼절로 부지하는 당대의 문화가
어느 날 꽃이 피긴 피리라는 중도보수주의는
필경 무덤까지 따라와
수세대에 이어질 쇠사슬로 덮일 것이네
오 우리들의 광장엔 광대들뿐이고
누군가의 빈손이 허공을 휘젓네
<프라하의 봄1>, ≪초판본 고정희 시선≫, 이은정 해설, 102쪽
시인에게 수유리는 특별한 곳이었다. 사월혁명 묘역, 그리고 뒤늦게 진학한 대학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70년대 후반을 보내며 민중의 시선과 문학의 뿌리를 얻었다. 그의 시는 광주로, 여성으로, 심장이 뛰고 이성이 향하는 곳으로 거침없이 나아갔지만 수유리를 잊은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