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박남수 시선
지만지 한국 근현대시문학선집 신간, ≪초판본 박남수 시선≫
내 속에 새 있다
박남수는 새의 시인이다. 세상의 운명인 중력을 거부하는 존재, 새는 순수하다. 포수가 그를 겨냥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중력이 작동하고 새는 지상으로 추락한다. 시인은 어디 있었을까? 그는 대답한다. 은유의 새가 아니라 실재의 새가 기왓골을 쫑쫑쫑 옮아 다닌다.
아침 이미지 壹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物象들은 몸을 움직이어
勞動의 時間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地上의 잔치에
金으로 타는 太陽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開闢을 한다.
연방 선하품을 하는
아낙들의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는
하나씩 아침의 幸福이 담기고
이른 녘의 起動이 振幅을 넓히는
아침놀이 거리에도 선다.
≪초판본 박남수 시선≫, 박남수 지음, 이형권 엮음, 76쪽
당신이 이 시를 꼽는 까닭은?
순수한 서정과 이미지를 강조하는 박남수 시를 단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박남수에게 새란 무엇인가?
내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다.
그 세계에 무엇이 있었는가?
<새 1>에서 “새”는 지상에서 먼 “純粹”의 존재를, “포수”는 그러한 가치를 훼손하는 현실적인 존재를 표상한다.
순수와 현실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나?
“순수”는 소유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실재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순수가 실재한다는 주장인가?
<새 3>에서는 “나의 內部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隱喩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앉는/ 實在의 새가 살고 있다”고 적는다.
이미지 아닌가?
아니다.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실재의 새”를 추구한다.
박남수는 누군가?
‘새의 시인’이다.
모더니스트인가?
감각적, 존재론적 이미지와 표현미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다. 미국 이민 이후의 시는 인생에 대한 감성적 인식이 주조를 이룬다. 이때는 리리시즘 성향을 보였다.
편하게 살았나?
분단과 가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살았다. 1.4후퇴 때 월남해 평생 실향민으로 살았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 가 그곳에서 죽었다.
등단은?
1939년 10월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심야>, <마을>이 게재되었다. 1940년 1월까지 <마을>, <주막>, <초롱불>, <밤길>, <거리> 등을 연속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창작 활동은 이보다 몇 해 앞선다.
첫 시집은?
1940년에 출간된 ≪초롱불≫이다. 모더니즘에 바탕을 두고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형상하는 시가 많았다.
김기림이나 김광균과는 어떻게 비교되는가?
그들은 도시적 소재를, 박남수는 전원적 소재를 수용했다.
전원 소재의 예를 들면?
표제작 <초롱불>을 보자. 배경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다. “행길도 집도” 아주 감추어진 듯한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어디론가 움직이는 “초롱불”만 희미하게 보인다. “산턱 원두막”을 “지나”서 무너진 “옛 城터”를 “돌아”서 가는 “초롱불”이 점점 더 원경으로 나아가면서 “꺼진 듯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든” 모습으로 작고 희미한 불빛이 다시 나타난다. 이 시각 이미지는 “풀 짚는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복합 감각을 환기한다.
전형적인 이미지즘 아닌가?
그렇지만, 이미지가 토속 풍광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두 번째 시집 ≪갈매기 소묘≫는 18년 뒤에 나왔다. 뭘 했나?
일본 유학 뒤 북한에서 은행원으로 지내다가 1.4후퇴 때 월남했다. 현실 생활이 어려웠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시에 열중하지 못했던 듯하다.
이 시집에서 나타난 변화는?
이전의 이미지즘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드러낸다.
어떤 성찰인가?
한국전쟁 이후의 현실 상황과 형이상학의 세계를 존재론적 이미지로 형상하려 했다. 이미지 구조가 한층 복잡해지고 사물의 내부와 외부를 병치시키려는 노력도 자주 눈에 띈다.
이민 후 미국에서 쓴 시는 어떤가?
모더니즘이나 이미지즘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곳에 무엇이 자리 잡았나?
노스탤지어, 한 인간의 실존 의식이 자리 잡는다.
이민 생활 때문인가?
이민뿐만 아니다. 평생이 유랑, 그 자체였다.
시는 무엇을 했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무했다.
무엇을 통해 스스로를 토닥였는가?
<맨하탄의 갈매기>에서 허드슨 강 근처 “맨하탄의 어물시장”에서 본 “갈매기”에 감정을 투사한다. “울면서, 서럽게” 날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민 오기 전 북한의 “남포”, “부산 포구”인 “다대포”에서 보았던 “갈매기”를 연상했기 때문이다.
슬픔은 극복되는가?
갈매기”의 울음에 “슬픈 比重의 세월”이 담겨 있는 것에 주목한다. 인간의 삶이 지닌 슬픔이라는 공통 감정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맨하탄”이든 “부산”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국땅인 “맨하탄”에서 서러움과 슬픔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세월을 보내”고자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형권이다.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다. 문학의 역사 의미를 탐구한다. 비판 정신과 소통의 미학을 확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