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국사집
불교문학, 고려 문학 신간 <<원감국사집 圓鑑國師集>>
나는 뭣하는 인간인가?
13세기 지구는 원의 세계였다. 고려는 저항했고 현실은 참담했다. 엘리트는 참여와 도피를 오가며 갈등한다. 그것은 현실과 피안이기도 하고 현재와 미래이기도 하며 실존과 역사이기도 했다. 굶어죽어가는 민중을 바라보며 고려 지식인은 자문한다. 나는 왜 인간이란 말인가?
造艦力已疲
尺地不墾闢
民命何以資
民戶無宿糧
太半早啼飢
況復失農業
當觀死無遺
嗟予亦何者
有淚空漣洏
싸움배 만들다 힘은 다했고/ 척지는 개간도 못했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연명할까/ 집집이 양식 떨어져/ 굶어 우는 이가 벌써 태반인데/ 농사마저 다시 잃고 말았으니 /죽음 바라볼 일만 남았다/ 슬프다, 나는 뭣하는 인간인가/ 눈물만 괜히 흐른다
어떤 시인가?
<憫農黑羊四月旦日雨中作>, 다시 말해 농민을 불쌍히 여겨 흑양 4월 1일에 빗속에서 지은 작품의 일부다.
시인은 왜 우는가?
당시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전쟁 물자 제공을 강요했다. 농민들은 전함(戰艦) 제작에 동원되어 농사철도 놓쳐 버렸다. 중생 제도에 서원(誓願)을 둔 충지는 농민의 아픔을 절실하게 그리고 “나란 무엇하는 사람인가?”라고 뼈저리게 자문한다.
충지는 누구인가?
고려 후기 승려다. 속명은 위원개(魏元凱), 원감국사는 시호다. 휘(諱)는 법환(法桓)인데 후에 충지로 고쳐 불렀으며, 자호(自號)는 복암(宓庵)이다.
선과 교, 어느 쪽인가?
선교불이적(禪敎不二的)이다. <조백론을 설명하던 차에 게송을 지어 동범 제덕에게 보임(演棗栢論次 有偈示同梵諸德)>에서 “선(禪)과 강(講)이 본래 한 근원임을 알리”라고 했다.
출가, 환속 다시 출가의 이유는?
일찍이 출가했다. 그러나 환속해 벼슬 생활을 하다가 29세에 다시 출가했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모친의 뜻이었다고 한다.
환속의 삶은 어땠나?
17세에 사마시에 합격, 19세에는 예부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영가 서기(書記)를 거치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 국위를 선양했다. 옥당(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탄복했다.
잘나가던 관료가 불가로 돌아온 까닭이 무언가?
시대의 영향이다. 백성은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강화도 고려 정부에 혹사당했다. 전쟁, 민란, 질병,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현실 도피였나?
산사라고 편치 않았다. 생명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하고 백성의 고통을 공유하려 했다. 중생을 제도해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임금을 축원해 호국을 기원했다.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원감국사 충지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시(詩) 240편, 문(文)과 표(表) 각 5편, 소(疏) 46편, 서(書) 6편이다.
시가 대부분인데 이유는?
어려운 시대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운문인 시가 가장 적절한 형식이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나 원천석의 ≪운곡시사(耘谷詩史)≫도 모두 시로 이루어져 있다. 공자도 시 300편을 외우면서도 외교나 정치에 도움이 안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어떤 시가 있나?
당로자(當路者)와 주고받은 시가 많다. 항몽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사에도 없는 내용이 많아 13세기 시대 분위기를 잘 알려 주고 있다.
삼별초 진압을 지지하는 시가 있는데?
암담한 현실을 당장에 벗어날 수 없을 바에야 대세에 따라 일보 후퇴해 실익을 추구하려던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보만 후퇴했다는 증거는?
원나라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보내 잃었던 수선사(修禪社)의 토지를 되찾았다.
애민우국 정신이 글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나?
몽고에 대한 항쟁, 삼별초의 항쟁, 정동(征東)의 역(役), 그리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참담한 고통을 역사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문학성은 어느 정도였나?
원감국사는 원래 문장으로 유명했다. ≪동문선≫에 승려로서는 가장 많은 글이 실렸고, 유림의 선비들도 흠모할 정도였다.
역사 사료로서 가치는?
이 책에 실린 제문이나 소, 표문, 서 등은 모두 13세기 고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다. 정사인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고려 시대 문집에도 없는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2006년 문화재청에서 보물 1459호로 지정한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의 내용도 모두 수록되어 있다.
언제부터 ≪원감국사집≫에 관심을 가졌나?
대학원 석사 과정 때 이 사료의 중요성을 알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미 출판된 복본이 있다. 이 책만의 차별성은?
단순한 고문 번역이 아니다. 오랫동안 ≪원감국사집≫을 연구해 왔기에 번역, 주석, 해설이 전문적이라고 자신한다. 또 ≪원감록≫에는 없고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에만 실려 있던 작품 8편을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했다. 원문에는 없는 시 2편을 발굴해 수록했고 송광사의 <원감국사비문>을 추가했다.
2013년에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나?
공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역사학도는 13세기 고려 사회상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문학도는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그의 시 한 수를 더 즐겨 보자면?
이 책 48쪽을 보라.
舍弟平陽新守文愷 將抵州治 先到山中 是夕會有雨 相與話盡十餘年睽離之意 不竟至天明 因記蘇雪堂贈子由詩中 所引韋蘇州 何時風雨夜 復此對床眠之句 作一絶
與君相別十三年 落北江南兩杳然
那料鷄峯風雨夜 白頭今復對床眠
어떤 내용인가?
옮기면 이런 말이다.
평양에 부임하는 아우 수령 문개가 주(州)를 다스리기 위해 이르렀다가 먼저 이 산중에 찾아왔다. 이날 저녁 마침 비가 내려 서로 10여 년이나 떨어져 지냈던 회포를 나누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소설당이 자유에게 준 시 가운데 인용한 위 소주의 “어느 때 비바람 치는 밤에 다시 잠자리를 같이할까”라는 구를 기억하고 1절을 지어 문개에게 주었다
그대와 이별한 지 13년 낙북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네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 같이할 줄을
≪원감국사집≫, 충지 지음, 진성규 옮김, 48∼50쪽
왜 이 작품을 골랐는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형제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당신은 누군가?
진성규다.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