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윤곽
탕크레트 도르스트(Tankred Dorst) 의 ≪검은 윤곽(Die Schattenlinie)≫
연극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늘 그런 듯하지만 언제나 달라지고 있다. 변화는 존재가 아니지만 존재는 변한다. 어제의 존재와 내일의 존재 사이에서 현대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연극이 대답한다. 질문하라. 우리는 누구인가?
도대체 주변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온 세상이 비명으로 가득 차 있다. 벽은 울부짖는 소리를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만큼 여전히 굳건하지만, 누군가 창문을 열어젖히면 그 소리가 밀려들어 온다. 누군가 텔레비전을 켜면 그 소리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는 가족을 덮친다. 밖에 나갈 때, 혹 우연이라도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꽂지 않았다면 양손으로 귀를 막아야 한다. 마치 혼란스러운 도망길에 오른 듯, 도처에서 양손으로 귀를 막고 뒤섞여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총격으로 바닥에 쓰러지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지붕 위에는 저격수들이 서서 행인을 겨눈다. 그들은 몸을 숨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맑은 하늘 아래 그들의 윤곽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들은 마치 검은 천사처럼 저 위에 서 있다. (중략)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도시가 폐허가 되고, 교각이 부러지고, 백 층짜리 건물이 무너지며, 갈가리 찢기고 조각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석회 구덩이로 쓸려 들어가는 원인이 사실은 끊임없이 커지는 살인 욕구, 이루어진 모든 것을 다시 파괴하려는 열화 같은 욕망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공포와 폭력 행위의 소리들을 점차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분명히, 아주 가까이서, 때로는 아주 멀리서부터, 마치 메아리처럼, 아니면 서서히 나타나는 끔찍한 사건의 시작처럼.
≪검은 윤곽≫ 탕크레트 도르스트 지음, 정민영 옮김, 5∼6쪽
이 연극이 정말 이렇게 시작되나?
도입부다. 프롤로그처럼 제시되는 지문이다. 조명이 들어오기 전 이 텍스트를 낭독하는 목소리로 연극이 시작된다.
이 지문의 기능은?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을 함축한다. 독자는 이 지문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상상을 토대로 다음 장면을 받아들이고, 현대사회의 일그러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다.
<검은 윤곽>은 어떤 작품인가?
독일 현대극을 대표하는 작가 탕크레트 도르스트의 희곡이다. 도르스트는 주제를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해 왔는데 이 작품은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우르줄라 엘러와 공동 집필한 경위는?
도르스트와 엘러는 1971년에 <잔트>를 텔레비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 중 알게 됐다. 이후 엘러는 도르스트의 반려자로서 곁에서 작품 창작을 돕고 있다. 도르스트는 작품 대부분을 아내와 공동 작업으로 완성했다.
형식의 특징은?
특정한 사건이나 줄거리 없이 독립된 13개 장면으로 구성했다. 극은 대체로 말투스 집이라는 사실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진행되지만 흑인 남자와 흑인 어머니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다. 사실과 환상을 결합하는 독특한 표현 형식으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당장 개선해야 할 과제인 동시에 악몽 속 한 장면인 것처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이야기가 되는가?
말투스 가족 이야기다. 말투스는 계몽주의를 숭배하며 인종주의와 폭력에 반대하는 학자다. 극이 진행되면서 평범한 듯 보이던 말투스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가 구체화한다. 리트비아인 아내 릴은 큰아이가 장애아인 현실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들 옌스는 스킨헤드가 되어 사사건건 말투스와 충돌한다. 급기야 옌스가 흑인 남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투스는 판사 앞에서 아들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가족 극처럼 보이는데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언뜻 그렇게 보인다. 지식인 가정이 가족 갈등 때문에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종주의, 낯선 것에 대한 배타성, 폭력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비인간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다.
말투스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면서 아내를 구타한다.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집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 놓는다. 자신이 열려 있는 사람임을 내세우는 상징이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아내를 구타하고, 이성을 잃고 옌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은 계몽주의를 신봉하고 관용과 인류애를 설파하는 것과 완전히 모순된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현재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가면 뒤에 숨은 실체는 상상보다 더 끔찍한 모습일 수도 있다,
예니퍼의 절규, 삶이 너무 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옌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친 뒤 충격에 빠진 말투스는 정신 이상을 보이며 쓰레기장에 버려진 캠핑카에서 생활한다. 예니퍼가 그런 그를 찾아와 절규한다. “삶이 너무 길어요! 아직도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다고요.” 그녀의 절규는 암울한 미래밖에 남지 않은 현대인의 외침으로 들린다.
현대인의 미래는 정말 이렇게 캄캄한가?
극단적인 비관주의라 할 수 있다. 추상적이며 전혀 새롭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날로 심해지는 현대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에 대한 인식은 간과해서는 안 될 보편적인 문제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시의성 있게 읽힌다. 외국인 혐오와 착취, 배타적 이기주의 등 세계화 과정에서 겪는 전형적인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현대극의 대표 주자인 저자가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탕크레트 도르스트는 독일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앞서 <나, 포이어바흐>가 번역되었고, <커브>가 공연되기도 했지만 당시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 작품은 현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표면화함으로써 시대 인식을 역사적 성찰까지 이끌어 간다. 이 책은 국내 연극계에 연극이 가져야 할 사회 비판 기능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탕크레트 도르스트는 누구인가?
1925년 기계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43년, 고등학교 시절에 나치노동봉사에 소집, 1944년 군에 징집되었다가 영국과 미국 포로수용소 생활을 경험한다. 1947년 말에 서독으로 석방된 뒤 뮌헨대학에서 독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했다. 1960년에 발표한 <커브>가 뤼베크에서 초연해 성공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독일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아동극, 방송극,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까지 활발히 작품 활동 중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강한 정치성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자기기만과 인간성 상실, 소통 두절,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낯섦, 현대사회 문제 등을 독특한 개방 형식에 담아낸다. 그의 희곡은 변화하는 정치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의 위치를 돌아보게 하며, ‘나’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에서 나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삶과 글쓰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흥미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흥미다. 연극에 필요한 본질은 타인에 대한 흥미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다시 발견한다.” 도르스트의 말이다. 그에게 연극은 다른 이들의 모습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연극으로 발견하는 나는 어떤 나인가?
그에게 현재는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변화하는 상황 자체다. 변화하는 상황에 존재하는 인간을 관찰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인간을 발전으로 이끄는 연극의 역할이다. 이와 관련해 도르스트는 “연극은 바퀴나 불처럼 인류가 만들어 낸 위대한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극작법, 연기 법칙은 변화하고 세계상도 변한다. 그러나 연극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항상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나는 연극을 교훈을 주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기관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도르스트에게 연극은 무엇인가?
그에게 연극은 인간을 보여 주기 위한 ‘실험’이다. 따라서 그는 연극을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실험을 위한 재료로 간주한다. 연극이 갖는 역사성과 정치성을 중요시하면서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도르스트의 연극은 제시의 연극이다. 역사와 시대 상황에 대한 독자, 관객의 성찰과 판단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군가?
정민영이다.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