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悲哀)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對話)를 묻는다
≪문병란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 10~11쪽
지난 9월 25일, 시인은 이승에서의 시 작업을 마감하고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시를 무기로 폭력에 맞설 때도 “시의 본질인 서정의 맑은 샘물을 잃지 않으려 애써왔다”고 말씀하던 시인. <꽃씨>는 그가 육필시집을 손수 엮으며 첫머리에 올린 작품입니다. 가을날 삼가 고인이 남겨준 꽃씨 한 알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