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지은이에대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을 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서 우리는 단 한 사람의 긍정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해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의를 돌린 사람이 그 유명한 프로이트다. 그의 논문 <도스토옙스키와 부친 살해>는 비록 도스토옙스키의 극히 작은 일면을 부각한 것이기는 하나, 도스토옙스키를 전 세계 심리학의 중심부에 우뚝 자리매김하게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8세 되던 해, 1839년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 살해를 당하는데, 한 도스토옙스키 전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그는 맞아 죽었을 뿐만 아니라, 성기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어떠한 이유로 농노들의 원한을 샀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최초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의 첫 발작 시기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이견이 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그 후로 평생 동안 이 병은 도스토옙스키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의 많은 주인공들이 이 병을 나누어 가진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백치≫의 미시킨 공작도, ≪악령≫의 키릴로프도, 마지막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부친 살해자 스메르댜코프도 다 간질병을 갖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간질 발작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질병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간질 발작의 순간은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신의 세계를 넘볼 수 있는 경계 이월이 가능한 절대 황홀경의 순간이었고, 유한한 존재가 무한의 세계를 일순이나마 맛볼 수 있는 신비한 순간이었으며, 세계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의 순간이었다.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불꽃같은 찰나의 순간이 갖는 이러한 미학적·철학적 의미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바벨 알렉산드로비치라는 아들을 데리고 있던 미망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가 죽고 나서도 이 아들의 낭비벽에 많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1864년 가장 가까웠던 형제인 형 미하일이 죽자 그가 남긴 가족의 부양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가 장편소설을 많이 쓴 이유에는 페이지에 따라 받게 되는 고료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빚에 허덕이다가 1865년 결국 그는 출판업자 스텔롭스키에게 앞으로 쓰게 될 작품의 저작권을 헐값에 넘기게 되고, 날짜를 맞추기 위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닛키나(19세)를 고용했다. 그래도 새옹지마라는 것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죽는 날까지 도스토옙스키가 쓰는 모든 작품에 대한 권리를 스텔롭스키가 갖게 되는 굴욕적인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서 속기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금껏 알던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안나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보다 26세나 어린 안나는 작가가 갖지 못한 많은 면들, 즉 현실성, 결단력, 추진력, 경제관념, 실행력 등등을 갖고 있었다. 삶이 늘 그렇듯,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함께 새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이듬해 결혼을 한다. 이때부터 도스토옙스키는 아마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되었으리라. 왜냐하면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해 안나가 없는 돈을 긁어모아 4년간 외국으로 피신 여행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골치 아픈 경제적·현실적 문제들은 안나가 거의 처리했으므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대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어린 안나의 뒤에 숨어 있었고, 안나는 1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도스토옙스키가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도스토옙스키는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멤버들을 사형에 처할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젊은 혁명가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니콜라이 1세는 극적인 계획을 세웠다. 새벽에 자다 말고 맨발로 눈 쌓인 교도소 마당에 끌려 나온 멤버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몇 줄로 서게 된다. 앞에는 총살형을 집행하기 위해 총을 겨눈 군인들이 있었다(1849년 12월 22일). 삶과 죽음을 몇 초 사이로 남겨 놓고, 그들은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사형집행에서 구해지고,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옮겨진다. 차르의 이 같은 잔인한 연극 놀이는 섬세한 신경의 도스토옙스키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게 되고, 이 인상은 작품 ≪백치≫에 잘 드러나 있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죄수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책은 성서였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6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지만, 이 ≪시대≫지는 1863년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고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해,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해서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해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역자는 이렇게 말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1881년 1월 28일,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이 넘쳐 나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