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원유경이 옮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인간에게 삶이 아닌 것이 있는가?
삶을 예술로 간주한 도리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자기 대신 초상화가 늙어 가게 만든다. 살인과 사체 유기, 복수가 뒤따르고 공포를 잊기 위해 아편에 의지한다. 이렇게 삶은 무너진다. 오스카 와일드는 무엇을 보았을까? 예술의 자율성은 공허일 뿐이고 삶은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 세기말적 심미주의는 이렇게 사망한 것일까?
“그래, 바질, 당신은 영혼을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신뿐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커튼을 젖히면, 당신은 내 영혼을 보게 될 거예요.”
그는 커튼을 확 뜯어내어 바닥에 내던졌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징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화폭 위의 흉측한 얼굴을 본 순간 화가의 입술에서 공포의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 표정은 그를 역겨움과 혐오감에 휩싸이게 했다. 세상에!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무리 흉해도 분명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걸 그렸을까? 그림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두려워졌다. 그는 촛불을 집어 들고 그림에 갖다 대었다. 왼쪽 모서리에 선명한 붉은색으로 길게 늘여 쓴 자신의 서명이 있었다!
그는 이런 수치스럽고 야비한 풍자화를 그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 작품이었다. 순간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작품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왜 그림이 변한 것이지? 그의 입술이 말라붙은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마침내 홀워드가 외쳤다. 그의 귀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날카롭고 야릇하게 들렸다.
“몇 년 전 내가 미성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만나 훌륭한 용모에 대해 허영심을 갖도록 가르쳤어요.”
도리언 그레이가 손으로 꽃을 으스러뜨리며 말했다.
“어느 날 당신은 나를 당신 친구에게 소개했고, 그는 내게 젊음의 경이로움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당신은 내게 아름다움의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내 초상화를 완성했지요. 난 정신이 나간 한순간 소원을 빌었어요.”
“기억나는군!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방이 습하군. 화폭에 곰팡이가 피었을 거야. 내가 사용한 물감이 무슨 독성이 있는 금속을 포함하고 있었거나. 정말이지 이런 일이 있어날 수는 없어. 불가능해. 이건 사티로스의 얼굴이야.”
“그건 내 영혼의 얼굴이에요.”
“세상에! 내가 무엇을 숭배했던 거지! 이건 악마의 눈을 하고 있어. 하나님 맙소사! 이건 자네가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왔는지 보여주는 증거로군. 자네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타락한 게 틀림없어!”
그는 그림에 불을 들이대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표면은 별로 훼손되지 않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본 그때 그대로였다. 야비함과 끔찍함이 생긴 것은 분명 내부로부터였다. 내적인 삶의 어떤 이상한 태동을 통해 죄의 타락이 천천히 그 그림을 좀먹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묘지에 놓인 시체의 부패도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도리언, 이게 무슨 교훈이란 말인가! 얼마나 무서운 교훈인가! 우리 함께 기도하지. 나는 자네를 너무 지나치게 숭배했어. 나는 그 때문에 벌을 받는 거야. 자네는 자신을 너무 숭배했고. 우리 둘 다 벌을 받는 거야.”
“바질, 너무 늦었어요. 내겐 이제 그런 말들이 무의미해요.”
“조용히! 그런 말 말게. 자네는 살아오면서 악을 충분히 저질렀어. 세상에! 자네, 저 저주받은 것이 우리를 흘겨보고 있는 게 보이나?”
도리언 그레이는 그 그림을 흘낏 쳐다보았다. 갑자기 바질 홀워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이 치밀어 올랐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에게서 암시를 받은 것처럼, 그 냉소 어린 입술이 그의 귀에 속삭인 것처럼. 쫓기던 동물의 미친 듯한 격정이 그의 내부에서 일깨워졌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을 증오했다. 평생 증오했던 그 어느 것보다 더 심하게. 그는 거칠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에 놓인 색칠된 궤짝 꼭대기에서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거기에 꽂혔다. 칼이었다. 그는 천천히 홀워드의 뒤로 가서 칼을 집어 들었다. 홀워드는 일어날 것처럼 의자에서 움직였다. 그는 홀워드에게 달려들어 귀 뒤쪽 혈관에 칼을 꽂아 넣고 그의 머리를 테이블 쪽으로 내리누르면서 찌르고 또 찔렀다.
숨죽인 듯한 신음 소리와 피에 질식한 듯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는 두 번 더 찔렀다. 그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펫 위로 똑똑 떨어지는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고 층계참으로 나갔다. 집은 너무도 조용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몇 번이고 멈춰 서서 기다렸다. 아니었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단지 자신의 발소리뿐이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천줄읽기≫, 오스카 와일드 지음, 원유경 옮김, 169~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