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주의 영욕의 역사
경주는 천 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일개 지방 소도시로 전락한 채 명맥을 유지했다. ≪동경잡기≫에는 경주의 영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때문에 ≪동경잡기≫의 자료 가치는 다양한 방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각동(各同)·각방(各坊) 등을 통해 17세기 중반 경주 지역의 통치 구조와 수취 구조는 물론 향촌 사회의 운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인물 관련 항목에 소개된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서는 과거 경주 지역의 인물사뿐 아니라 ≪동경잡기≫ 편찬 당시 사족(士族)들의 동향과 경주 부민의 동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고적(古蹟)·불우(佛宇)·궁실(宮室)·학교(學校)·능묘(陵墓) 등에는 17세기 중반까지 경주 지역에 있던 문화 유적의 현황과 위치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현재는 없어진 여러 유물·유적에 대한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으므로, 향후 경주의 시·공간적 역사 자취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데 활용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동경잡기≫다운 발췌본
≪동경잡기≫의 특징이라 한다면, 다른 읍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인 항목, 진한기와 신라기에서 진한과 신라의 역사를 왕대별로 간단히 정리했다는 점, 경제나 정치·군사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인물 관련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분류는 물론 서술 내용 비중이 다른 읍지보다 훨씬 높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특징을 살려, 진한기와 신라기를 거의 완역하고, 인물 관련 항목을 중점적으로 발췌했다. 그리고 각주를 통해 ≪동경잡기≫가 참고한 원전과 사건 및 각종 용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이 책의 완역본은 지루한 구성, 어려운 단어, 방대한 분량 등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최대한 보완하여 일반 대중도 다가가기 쉽게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책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을 발췌해 ≪동경잡기≫다운 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가장 흥미를 가질 만한 인물 항목의 비중을 높였다.
200자평
수천 년의 경주 역사를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읍지다. 읍지는 고을의 연혁, 지리, 인물, 산업,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각 항목을 통해 각 시대의 경주 지역 통치 구조와 수취 구조, 사족과 부민의 동태, 여러 유물·유적까지 폭넓은 정보를 보여 준다. ≪동경잡기≫의 체제는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발췌해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다.
엮은이
1629년(인조 7)에 수령(守令)을 지낸 아버지 민진량(閔晉亮)과 첨정(僉正)을 지낸 유대이(兪大儞)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장오(章五)며, 호는 수월당(水月堂)이다.
1648년(인조 26)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1653년(효종 4)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종6품)과 육조(六曹) 중 공조(工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정6품)을 거쳐서 춘추관기사(春秋館記事: 정6품)·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종5품)·
병조정랑(兵曹正郞: 정5품)·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정5품)·
장흥현감(長興縣監: 종6품)·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종5품)·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정6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6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5품)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진 가도를 이어 나갔다.
민주면은 1660년(현종 1) 인천부사(仁川府使: 종3품)로 임명된 후 그곳에 있는 자연도(紫燕島)의 국방 시설을 엄중히 감시했다. 1661년(현종 2)에는 경기 지방에 기근이 크게 들자 왕에게 상평청 곡식을 내어 고을 규모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성사하기도 했다. 같은 해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사헌부장령(掌令: 정4품)을 맡아 몇 번의 체직(遞職)이 있기는 했으나 1665년(현종 6)까지 장령 소임을 유지했다.
이후 1665년 4월 길주목사(吉州牧使: 정3품)를 거쳐, 같은 해 5월 광주부윤(廣州府尹: 종2품)으로 부임하면서 지방관으로서 관직 경력을 보태어갔다. 1667∼1668년(현종 8∼9)에 서울로 잠시 돌아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승지(承旨: 정3품)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1669년(현종 10) 다시 경주부윤(慶州府尹: 종2품)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동경잡기≫를 편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민주면은 경주부윤으로 재직하던 1670년 4월 근친(覲親)으로 휴가를 얻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부재한 가운데 같은 해 6월 18일 경주부에서 진상(眞祥)이란 여자가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책임 소재를 놓고 한 달여 동안의 논란 끝에 7월 17일 민주면의 파직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해 민주면은 40여 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옮긴이
장창은은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서 강의하였다. 현재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북악사학회 회장과 신라사학회 편집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고구려발해학회·신라사학회·역사문화학회·한국고대학회·한국고대사탐구학회 등의 편집위원과 탐라문화연구원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개인 저서로는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신서원, 2008), ≪고구려 남방 진출사≫(경인문화사, 2014), ≪한국고대사 탐색의 세 가지 시선≫(역사인, 2019), ≪삼국시대 전쟁과 국경≫(온샘, 2020)이 있고, 편역서로 ≪삼국사기≫(2009)와 ≪동경잡기≫(2009)를 출간했다. 함께 지은 책은 ≪신라 속의 사랑, 사랑 속의 신라≫(삼국시대편, 2006; 통일신라편, 2008), ≪서울 2천년사6−삼국의 각축과 한강≫(2015),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12−신라의 대외관계와 국제교류≫(2016), ≪쉽게 읽는 서울사−고대편≫(2018) 등이 있다.
삼국의 대외관계와 영역사에 대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고대 탐라국 연구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들과 공유할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차례
권1
진한기(辰韓紀)
신라기(新羅紀)
경주지계(慶州地界)
건치연혁(建置沿革)
풍속(風俗)
산천(山川)
승지(勝地)
토산(土産)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궁실(宮室)
창고(倉庫)
학교(學校)
역원(驛院)
사묘(祠廟)
능묘(陵墓)
기우소(祈雨所)
권2
불우(佛宇)
고적(古蹟)
호구(戶口)
전결(田結)
제언(堤堰)
각방(各坊)
각동(各同)
명환(名宦)
인물(人物)
권3
우거(寓居)
과목(科目)
음사(蔭仕)
효행(孝行)
우애(友愛)
충의(忠義)
정렬(貞烈)
기예(伎藝)
서적(書籍)
제영(題詠)
잡저보유(雜著補遺)
이문(異聞)
남지훈 후기
성원묵 후기
부록: 신라의 중앙 관등표
해설
엮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진덕왕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의 동생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다. 용모가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키가 7척인데 손을 드리우면 무릎 아래로 내려간다. 원년 정미는 [당나라] 정관 21년(647)이다.
-16쪽
저 옛날 혁거세(赫居世)는
오봉(五鳳) [원]년에 나라를 열었네.
천년의 오랜 세월 서로 전하여
치우친 한구석 겨우 보전했네.
계림(鷄林)의 땅을 을러대어 바쳐서
곡령(鵠嶺)의 하늘에 내조(來朝)했네.
면면히 이어오던 삼성(三姓)의 제사가
영원토록 끊어지니 참으로 가련하구나.
-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