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브레히트는 베데킨트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만큼 베데킨트는 독일 현대 연극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작가다. 작품에서 주로 시민사회의 전통적인 도덕관, 특히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 <룰루>는 베데킨트의 그런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준다.
출신도 모르는 부랑아 룰루가 독일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된 뒤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탄탄대로일 것 같던 그녀의 삶이 남편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연속해서 겪으며 조금씩 일그러져 간다. 궁색해진 형편을 못 이겨 룰루는 다시 거리로 나가 남자들을 유혹한다.
발표 직후 외설 시비에 휘말려 애초 의도대로 공연, 출판되지 못했으며 세 차례 재판을 거치면서 <땅의 정령>과 <판도라의 상자> 2부작으로 재구성되어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되었다. 여기에 곡을 붙인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는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데킨트는 작품의 첫 버전을 1894년에 완성하고 <판도라의 상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고자 했다. 하지만 내용이 선정적이라고 우려한 출판사에서 출판을 미루면서 작품은 여러 차례 수정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1913년에야 <판도라의 상자>가 출판되었다. 서문에는 작품에 가해진 혹독한 검열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1903년 뉘른베르크의 초연은 첫 공연 이후 경찰 제지로 결국 무산되었고, 그 여파로 이 작품은 출판도 되기 전에 음란물로 낙인찍혀 재판에 넘겨졌다. <룰루>에 대한 가혹한 검열의 시작이었다. 재판은 세 차례나 진행되었다. “예술성이 전혀 없는 저질 포르노”라는 비난에 맞서 베데킨트는 재판장에서 직접 작품을 낭독하며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재판부는 결국 이 작품이 관객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데 목적을 둔 것”이라는 베데킨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작품의 외설성을 보이려던 당국의 노력은 <룰루>가 비극성을 갖춘 예술 작품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낳았다.
당국이 이 작품에서 특히 우려했던 것은 성에 대한 묘사였다. 작품은 거리에서 꽃을 팔던 소녀 룰루가 상류사회에 편입된 뒤 남자들의 뒤틀린 욕망에 의해 순수한 열정이 짓밟히면서 팜파탈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내에겐 정숙을 요구하면서 뒤로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부정을 서슴지 않는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게다가 작품 말미에 영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미제 살인 사건의 범인 ‘잭 더 리퍼’를 등장시켜 사건을 재현한 것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베데킨트가 룰루라는 인물의 변천과 비극적 종말에 부여한 상징성을 이해한다면 ‘잭 더 리퍼’의 등장은 오히려 필연으로 다가온다.
룰루는 보호해야 할 소녀도, 비난받아야 할 악녀도 아니다. 베데킨트는 룰루를 육체적 매력을 지닌 여성을 넘어선, 신비롭고 원초적이며 자연적인 본성 자체로 묘사했다. 그녀의 비참한 종말은 자연적인 본성의 종말이다. 모성을 짓밟고 유린하고 꺾음으로써 유지되어 온 왜곡된 성 관념에 대한 베데킨트의 도발은 20세기 초, 경직된 독일 시민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룰루>는 현대 독자의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역자 이재진은 해설에서 작품의 출판 및 공연에 얽힌 굴곡진 역사를 자세히 썼다. 여러 번의 개작과 수정을 거치면서 초고에서 누락되거나 달라진 부분들도 수정 판본을 두루 참고해 빠트리지 않고 소개했다. 국내 유일한 독일베데킨트학회 회원으로서 역자의 전문성을 작품 해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자평
프랑크 베데킨트는 독일 현대 연극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작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그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에는 대표작 <눈뜨는 봄> 외에 제대로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다. <룰루>는 <눈뜨는 봄>에 드러난 베데킨트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 보여 주는 대작이다.
거리에서 꽃을 팔던 소녀 룰루는 상류사회에 편입된 뒤 남자들의 뒤틀린 욕망에 의해 순수한 열정을 짓밟히고 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가혹한 삶을 산다. 베데킨트는 룰루를 단순한 비극의 희생자, 혹은 냉소적인 팜파탈로 묘사하는 대신 이브와 같은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존재로 형상화했다.
<룰루>는 외설 시비에 휘말려 오랫동안 출판과 공연을 금지당했다. 결국 여러 번의 수정과 개작을 거쳐 현재의 2부작 구성을 갖추게 됐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되었다.
지은이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 1864∼1918)는 극작가, 연극배우, 풍자 가수, 잡지사 기자, <눈뜨는 봄>, <룰루−괴기 비극> 등으로 시민사회의 거짓된 성도덕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과 성적 자유를 내세웠다. 반부르주아 경향의 드라마로 출판과 공연이 금지되는 등 오랫동안 검열에 시달렸다. 빌헬름 왕조 시대에 검찰 당국에게만 시달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일반 관객도 베데킨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데킨트는 자연주의 연극에 등을 돌렸다. 표현주의, 부조리극 등으로 이어지는 베데킨트의 작품 세계는 20세기로 접어드는 독일 연극을 변화시켰다.
옮긴이
문학박사 이재진은 한국외국어대학과 독일 쾰른대학에서 독문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단국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단국대학 명예교수다. 한국 브레히트학회 회장을 지냈다. 레싱, 실러, 클라이스트, 뷔히너, 헤벨, 베데킨트, 브레히트, 뒤렌마트 등의 희곡과 작품 세계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연출, 번역, 비평, 창작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차례
땅의 정령(地靈)
판도라의 상자
해설
지은이에 대해
프랑크 베데킨트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조련사 : 이 여자는 불행을 뿌리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꼬시고, 유혹하고, 죽이라고,
어느 누구도 느끼지 못합니다.
(룰루의 턱을 쓰다듬으며)
나의 귀여운 것, 무언지 얌전한 척은 하지 말아요!
엉뚱한 짓을 하거나, 일부러 예쁜 척하지도,
괴팍하게 굴지도 말라고!
비평가들이 너를 별로 칭찬해 주지 않더라도 말이지.
야옹거리고 울부짖어서 우리에게서
너의 원래 여인의 참모습을 함부로 구겨 버릴 필요는 없는 거야.
오만상을 찌푸리고 우거지상을 해서
악덕을 갖춘 너의 청순함을 망쳐 놓을 권리는 없단 말이야.
너는 말이야−그래서 내가 오늘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너는 물론 자연스럽게 말을 해야겠지,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돼요!
모든 예술의 근본 철칙은 아주 옛날부터
분명함과 자명함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9쪽
슈바르츠 : (이 순간부터 점점 더 깊이 좌절하며) 처음 그 여자를 알게 되었을 때 내게 이렇게 말했죠, 자기는 한 번도 남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쇤 : 과부라고 그런 소리를 못하겠나! 자네를 남편으로 선택한 걸 영광스럽게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자네에게 주어진 권리를 생각해 보게나. 자네의 행운에는 한 점 흠잡을 데도 없지.
슈바르츠 : 그 영감님은 룰루에게 짧은 치마를 입혔더군요.
쇤 : 하기야 그분은 룰루와 결혼까지 하지 않았나! −그야 룰루의 걸작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 영감님을 설득해 결혼까지 했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이제 알 만큼 알았지. 룰루의 기막힌 사교술로 얻은 열매를 자네는 즐기고 있는 거니까.
-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