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하일 불가코프는 20세기 가장 주목받는 러시아 문호 중 한 명이다. 이 책은 불가코프가 문단에 들어서면서 쓴 중단편을 담았다. 불가코프가 러시아문학의 ‘거장’이 된 근원을 이 책을 통해 탐구할 수 있다. ≪백위군≫,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 불가코프의 주요 장편소설과 희곡에서 다루는 주제와 모티프인 우크라이나 내전과 소련 사회에 대한 작가의 풍자가 이 책에 실린 중단편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국내 미발표 작품들로 러시아문학의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직접 겪은 우크라이나 내전의 참상
러시아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불가코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모두 그곳에서 보낸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다. 이 책은 특히 작가가 직접 참전해 겪은 우크라이나 내전의 참상을 담은 작품을 수록했다. 불가코프는 키이우(키예프)의과대학 재학 시절 징병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내전이 발발하자 또다시 징병되며 전쟁의 포화를 또 한번 온몸으로 겪었다. <3일 밤에>와 <제가 죽였습니다>가 당시 작가의 경험을 생생히 담은 작품이다. <3일 밤에> 속 남성들은 수시로 강제 징병되고 남은 가족들은 남편, 형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도시 밖에서는 군인들이 활개 치며 사람을 때려죽인다. 한편, 도시 내부도 불침번을 서던 민간인이 살해당하는 등 안전하지 않다. <제가 죽였습니다>에서는 도시 밖 군인들이 벌인 잔혹한 행위들이 의사 야시빈의 목소리를 통해 좀 더 상세히 묘사된다. 의사 출신인 불가코프가 마치 직접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3일 밤에>와 <제가 죽였습니다> 두 작품은 이후 불가코프의 대표작인 ≪백위군≫의 뿌리가 되었다.
<중국인 이야기>는 원하지도 않은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는 한 개인의 모습을 절실하게 그렸다. 주인공 센진포는 외국인임에도 러시아군에 징병되어 결국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는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그의 모습은 일견 영웅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알기는커녕 러시아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징병되어 고국을 그리워하다 끝끝내 전사하는 모습은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죽어 간 젊은이들, 그리고 군의관으로 징병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불가코프 자신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러시아
<칸의 불꽃>, <심령술 모임>, <모스크바의 벽−전초기지에서>, <찬송가>, <채권 06조 0660243번−실제 사건>, <말하는 개>, <이집트 미라−노조원의 이야기>, <망자의 모험>은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모두가 평등한 완전무결한 세상을 표방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였지만 실상은 수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불가코프는 이러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어두운 단면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한다.<칸의 불꽃>에서 귀족의 저택이 박물관이 되고 천박한 이들이 저택 안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옛 주인들을 모욕하는데, 이는 혁명 이전의 것들은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는 죄명으로 타도의 대상이 된 세태를 반영한다. <심령술 모임>은 은밀한 모임이 경찰에게 발각되어 참가자들이 체포되는 이야기로, 우스꽝스럽게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비밀경찰이라는 소재를 드러냄으로써 당시 러시아의 강압적 분위기를 생생히 그린다. 중편 <소맷동에 쓴 수기>는 불가코프의 작가로서의 삶을 담은 자전적 수기로 불가코프 개인의 삶뿐 아니라 당시 러시아 문단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200자평
20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작가 중 한 명인 미하일 불가코프의 국내 미발표 중단편 13편을 수록한 작품집이다. ‘거장’ 불가코프가 문단에 들어서면서 쓴 작품들로 불가코프 문학의 근원을 탐구하게 해 준다. 러시아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불가코프는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다. 이 책은 작가가 직접 참전해 겪은 우크라이나의 내전 상황을 담은 작품을 함께 실었다. 중편 <소맷동에 쓴 수기>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작가로서 불가코프 개인의 삶뿐 아니라 당시 문단의 상황까지 잘 보여 준다.
지은이
미하일 불가코프(Михаил А. Булгаков)는 1891년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났다. 키이우(키예프)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불가코프는 적십자를 통하여 최전방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한다. 1917년 겨울, 러시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러시아에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불가코프는 예기치 못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수차례 요청한 끝에 1918년 2월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한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내전에 휘말려 또다시 징병된다. 키이우(키예프)를 점령한 데니킨의 백군 진영에서 군위관으로 활동하게 된 불가코프는 1919년, 퇴각하는 백군을 따라 러시아 남부의 블라디캅카스로 이동한다. 백군이 볼셰비키에게 패배하여 해외로 도주할 때 불가코프는 티푸스에 걸려 망명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남는다. 이후 의사직을 버리고 펜을 잡기로 결정한다. 1921년에 모스크바로 이사 오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불가코프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며 ≪기적≫, ≪노동자≫ 등의 신문 또는 잡지에 사설, 단편 등을 왕성하게 투고했다. 1924년에 소설 ≪백위군≫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1925년에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이 작품을 연극으로 각색해 달라는 요청도 받는다. 같은 해에 중편소설 ≪디야볼리아다≫, ≪비운의 알≫, 단편소설 <중국인 이야기> 등이 포함된 소설집도 출판된다.
하지만 중편소설 ≪개의 심장≫의 원고가 1926년, 압수당한 것을 시작으로 불가코프의 작품 출판에 제동이 걸린다. 1929년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 및 상연 금지되고 망명 신청마저도 거부당한다. 다음 해인 1930년에는 어렵게 창작에 매진하던 불가코프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희곡 ≪위선자들의 비밀 모임≫ 상연까지 금지된다. 스스로 작품 원고를 불태워 버릴 정도로 좌절한 불가코프는 결국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망명을 요청하였고, 얼마 후 스탈린이 직접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일해 볼 것을 권한다. 극장에서 조연출로 일하게 된 불가코프는 고골의 ≪죽은 혼≫, ≪검찰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고전 작품들을 각색하며 왕성하게 활동한다.
1939년에는 스탈린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바툼≫을 집필하지만 역시 스탈린이 상연을 금지시켜 버리고,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불가코프는 시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른다. 병상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 간 불가코프는 세 번째 아내인 옐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롭스카야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교정한다. 하지만 불가코프는 1940년 3월 10일 사망하고,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 사후 26년이 지난 1966년에야 출판된다.
옮긴이
김성건은 부산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러시아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러시아 카잔연방대학교에 입학하여 러시아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M. A. 불가코프 창작 세계 속 여성의 형상 유형 연구>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불가코프를 비롯한 20세기 러시아문학, 특히 판타지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다.
차례
3일 밤에
제가 죽였습니다
중국인 이야기
칸의 불꽃
심령술 모임
모스크바의 벽−전초기지에서
찬송가
채권 06조 0660243번−실제 사건
말하는 개
개의 삶
이집트 미라−노조원의 이야기
망자의 모험
소맷동에 쓴 수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지휘관이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그리고 지휘관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말들이 한데 뒤섞인 기이한 언어였다.
“아, 젠장! 부츠 벗어,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벗으라고, 이 개자식아! 네놈이 안 얼어 뒈져도, 내가 널 총살시켜 버릴 거니까, 개자식아!”
지휘관은 모제르 권총을 치켜 올리고는 슬로봇카 위에 떠 있던 금성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움직였다. 번갯불이 다섯 번 비스듬히 허공을 갈랐고, 지휘관의 손에서 터져 나온 다섯 번의 소음이 온 세상이 떠나갈 듯 유쾌하게도 귀청을 때려 댔다. ‘탕, 탕, 탁, 탕, 탕’ 하고 다섯 번 울린 메아리는 허공에서 즐겁게 휘돌다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서 장난치듯 쾌활하게 날아올랐다.
(…)
2일에서 3일로 넘어가는 밤, 바칼레이니코프 박사는 살면서 처음으로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 자정 무렵 그는 저주받을 다리 입구 옆에 있었다. 두 청년이 사람 한 명을 질질 끌고 눈길을 걷고 있었다. 끌려가는 사람은 다 해진 검은 외투 차림이었고 새파랗고 까매진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카자크 지휘관이 그들과 나란히 뛰면서 끌려가는 사람의 등을 꽂을대로 내려치고 있었다. 지휘관이 칠 때마다 머리가 흔들렸지만 피칠갑이 된 그는 이미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저 ‘으윽’ 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만 낼 뿐이었다. 꽂을대가 갈가리 찢긴 외투를 묵직하게 힘껏 내려찍을 때마다 목멘 소리가 답했다.
“윽…. 아….”
바칼레이니코프의 두 다리가 무거워지면서 후들후들 떨렸다. 눈 덮인 슬로봇카도 흔들렸다.
–<3일 밤에> 중에서
원뿔형 빛줄기 없음. 운모 케이스에 서린 검은 안개. 오랫동안 입을 다문 찻주전자.
전등의 불빛이 진귀한 새틴 천 조각 사이로 천 개의 작은 눈동자처럼 보인다.
“손가락이 아름답군요. 피아니스트 같아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다시 연주할 거예요….”
“못 가실 겁니다. 슬랍카 목에는 당신처럼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있어요. 제 마음속에는 우울함이 있죠, 아시겠지만. 지루하네요, 너무나도.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제 주변엔 단추, 단추들, 단….”
“저한테 키스하지 마세요…. 키스하지 마시라고요…. 가 봐야겠어요. 늦었네요….”
“당신은 못 가실 겁니다. 저기 가서 우시겠죠. 그런 습관이 있으시니까.”
“아니에요. 전 안 울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던가요?”
“제 스스로 알게 된 거예요. 제 눈에 다 보이는걸요. 당신은 우실 거고, 그럼 저는 우울해지죠…. 우울….”
“제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당신은 또 뭘 하고 있는 건지….”
원뿔형 빛줄기 없음. 진귀한 새틴 천 조각 사이로 빛나지 않는 전등. 안개. 안개.
―<찬송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