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성 조앤>은 프랑스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녀 조앤이 어떻게 프랑스를 구한 국민적 영웅이 되었는지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잔 다르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소녀는 알려진 대로 스스로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을 도와 백년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혔고, 종교재판 결과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그녀의 극적인 생애는 많은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실러는 그녀의 생애를 <오를레앙의 성 처녀>로 극화했고 브레히트는 실러의 희곡을 각색해 <도살장의 성 요한나>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주변의 불신과 압박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전장의 선두에 선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면을 빛나게 묘사한 작품들이다. 세간의 관심은 잔 다르크의 기구한 운명, 사후에야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극적 반전에 몰렸다. 그녀의 영웅성이 빛을 발할수록 그녀를 화형에 처한 종교재판은 부정하고 부당한 심판으로 몰렸다. 결국 잔 다르크의 생애 전체와 사후 복권 과정에 선입견과 편견이 작용하면서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져 버렸다. 잔 다르크에 대한 평가도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사실이 신화적 이야기로 각색되면서 잔 다르크는 웅장한 신파극의 주인공에 머물고 만다.
버나드 쇼는 일찍이 잔 다르크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있었다. 1913년부터 그녀를 주제로 작품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쇼는 10년 만에 희곡을 완성해 초연했다. 장장 세 시간 반에 달하는 공연이었다. 긴 공연 시간을 두고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쇼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선 오히려 세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성 조앤>을 출판하며 작품 분량이 맞먹는 긴 서문을 통해 쇼는 직접 공연 시간에 대한 변론을 펼쳤다. 연극이 좋아서 극장을 찾는 진정한 관객에겐 세 시간 반이 절대 긴 시간이 아닐 것이며, 쇼 자신은 바로 그들을 위해 극을 쓴다고 밝혔다. 더불어 잔 다르크에 대해 직접 연구하고 고증한 내용을 열거하며, 이 작품이 잔 다르크와 그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가장 진실하게 묘사한 것임을 입증해 나간다.
쇼는 우선 잔 다르크의 일대기에서 신파적인 요소를 모두 걷어냈다. 그녀가 실제로 천사의 계시를 직접 들었을 거란 추측은 많은 의문이 따를 뿐 아니라 그녀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왔다. 오히려 잔 다르크는 남다른 전략과 언변을 갖춘 천재였을 거라는 게 쇼의 생각이다. 또 쇼는 교황청이 그녀에 대한 처결을 두고 일곱 차례나 재판을 열어 가며 숙고하는 과정을 가졌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결과만을 놓고 당시의 재판이 부정하고 부당했다고 매도할 수는 없었다. 이는 잔 다르크 사후 급박하고 무성의하게 진행된 그녀의 복권 과정에 비한다면 오히려 매우 합리적인 토의를 거친 셈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쇼는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시 꾸며 나간다. 그리고 에필로그를 덧붙여 잔 다르크와 샤를을 비롯해 그녀의 화형과 복권에 관여한 인물들을 다시 소환했다. 전 장면들에 비해 다소 환상적으로 꾸며진 이 장면에서 쇼는 세계가 여전히 잔 다르크 같은 비범한 인물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작품의 주제를 강화한다.
비평가, 정치적 활동가, 논객으로서 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극작가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확고하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깨부수고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영문학사상 그의 서열은 셰익스피어 다음이다.
200자평
“현존하는 극작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누구인가?” 한 기자의 물음에 쇼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나지.” 그 자신만만함에는 근거가 있었다. 1925년 스위스 한림원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체, 재기발랄한 풍자로 이상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에 놓인 그의 작품을 기리며” 쇼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다. <성 조앤>은 쇼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다. 역사적 인물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문학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지은이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1856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난 극작가이자 비평가, 그리고 활발한 정치적 활동가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는 런던으로 이주했으나 정작 그는 초등학교 졸업 수준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놀라운 박식함은 대부분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서른 즈음에 그는 이미 연극과 음악 분야에서 인정받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카를 마르크스에 심취해 점진적 사회주의자가 된 뒤 영국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60여 편의 극작품을 썼는데,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역사적 비유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우생학과 알파벳 개혁을 지지했고 백신 접종과 조직적 종교를 반대했으며, 일차세계대전 때는 양측을 모두 비난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38년에는 직접 대표작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영화 대본을 써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64년에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라는 뮤지컬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한편 그의 정치·사회적 견해는 점차 과격해졌고 독재자인 무솔리니와 스탈린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1950년 94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 등 모든 상을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쇼에 대한 학자들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극작가로서 그의 위치는 확고하며, 종종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쇼비언(Shavian)이라는 어휘가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후대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옮긴이
임성균은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미국 루이지애나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숙명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한국밀턴학회와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학술 논문 55 편과 저술(번역 포함) 16권을 발표했으며, 2012년에는 에드먼드 스펜서의 ≪선녀여왕≫을 완역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부 명예교수다.
차례
서문
나오는 사람들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로베르 : 자네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아가씨 말이야. 이제 나도 그 애를 봤어. 말도 해 봤고. 첫째, 그 여자는 미쳤어. 그건 상관없지. 둘째, 그 여자는 평범한 농장 아가씨가 아니야. 그 여자는 자본가라고.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나는 그 여자의 계급을 정확히 알고 있어. 그 여자 아버지는 작년에 자기 마을을 대표해서 소송을 하느라고 여기 왔었거든. 농부야. 귀족 농부는 아닌데, 농사로 돈을 벌고, 그걸로 먹고사니까. 그래도 노동자는 아니야. 기술자도 아니고. 그자는 친척이 변호사거나 아니면 성직자일지도 몰라.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사회적으로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권력자들을 무척 귀찮게 할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을 말이지. 이제 자네가 도팽에게 데려갈 거라고 그녀가 믿도록 사기를 쳐서 그녀를 치워 버리려고 하는 게 자네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자네가 그녀를 곤경에 처하게 하면 자네는 내게 끝없는 골칫거리를 안겨 주는 것이라네. 내가 그 여자 아버지의 군주이고 그녀를 지킬 책임이 내게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친구로서, 아니면 친구가 아니더라도, 폴리, 내 말하는데 그녀에게서 손을 떼게나.
폴랑지 : (의도적인 근엄함을 지니고) 내가 이 아가씨를 속이다니 차라리 축복받은 성모님을 속일 걸세.
로베르 : (책상에서 내려서며) 하지만 그 여자 말이 잭과 딕도 자기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는군. 대체 무엇 때문에? 도팽에게 가겠다는 그 여자의 미친 생각에 자네가 동조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가?
폴랑지 : (천천히) 그 여자에게는 뭔가가 있어. 저자들은 말버릇이 아주 더럽지, 더럽다고. 저 아래 경비실에 있는 자들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가 여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어. 그 여자 앞에서는 욕을 하지 않는단 말이지. 뭔가 있어. 뭔가가. 그러니 그 여자 말대로 해 볼 가치가 있다네.
로베르 : 아, 정말, 폴리! 정신을 차리라고. 자네는 상식이 별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건 좀 너무하는군. (그는 역겹다는 듯 뒤로 물러선다.)
-136-137쪽
워릭 : 여기 있는 이 친구는 그 젊은 여성이 마녀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그 여성을 종교 재판에 세워서 그 죄목으로 화형에 처하시는 것이 고귀하신 주교님의 의무인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코숑 : 그 여성이 내 교구 내에서 체포된다면야, 그래야겠지요.
워릭 :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되어 간다고 느끼며)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그 여성이 마녀라는 점에는 아무런 합리적 의심도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코숑 : 우리는 여기서 단지 우리 자신의 견해만을 고려할 게 아니라, 프랑스 법정의 견해−혹은 편견이 되겠지만−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워릭 : (정정하며) 가톨릭 법정이겠지요, 주교님.
코숑 : 가톨릭 법정이 그 역할과 계시가 제아무리 성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다른 법정처럼 유한한 인간들이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작금에 유행하는 호칭대로 프랑스인이라면 단지 영국 군대가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 일에 마법이 개입되었다고 그자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10-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