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통기한을 넘긴 시인의 죽음
너는 나를 툭
내 가슴이 툭
별 하나가 툭
내 눈물이 툭
온 세상이 툭
-<툭>
이 시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중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시의 형식을 흉내 낸 언어유희를 떠올릴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가, 말기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유고시라면? 더구나 그 시인이 평소 우리말과, 특히 단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관련서를 펴낸 전문가라면?
그만한 비상한 언어 감각과 그만한 절박함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태어날 수 없었을 한 편의 절명시(絶命詩)로서 새삼스레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장승욱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시집보다는 ≪토박이말 일곱 마당≫,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등 잊혀졌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우리말(토박이말)을 찾아내고 다듬은 저서들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를 가까이 알았던 지인들에게 그는 평생 술과 함께 살아온 이력을 ≪술통≫이라는 산문집으로 펴낼 만큼 ‘주당’의 이미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술과 글을 사랑한 그의 삶은 지난 2012년 1월 25일 50을 갓 넘긴 나이에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별다른 자각 증상도 없이 그저 소화가 잘 안 돼 찾은 병원에서 말기 췌장암 진단을 받은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췌장암의 발병 원인이 그토록 마셨던 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나 있었던 듯이 병상에 눕기 불과 2년여 전에 쓴 <유통기한>이라는 시에서 요절에 대한 예감을 노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짝 친구에게 단언했다
내 나이 마흔
그때 나는 지구에 없을 거라고
요절은 꿈이었고 당위였고
손금에 새겨진 운명이었지
이상이 내 아저씨였고
기형도가 내 친구였다
기형도 20주기 모임에 가자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오늘
2009년 2월 10일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유통기한은 얼마나 지났는지
-<유통기한>에서
50의 나이는 ‘요절’을 운운하기에는 제목처럼 유통기한이 다소 지났을 수도 있겠지만, 이상 시인이 요절했던 시절보다 평균수명이 몇십 년이 늘어나 ‘환갑이 청춘’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요즘의 세태를 감안하면, 그 역시 자신이 꿈꿔왔던(?) 요절의 숙명을 이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장승욱은 조금 게을렀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간 냈던 시집은 달랑 ≪중국산 우울가방≫ 한 권뿐이었고, 시작보다는 우리말 찾기와, 그리고 술 마시기에 더 몰두해 왔다. 그런 그가 병상에 누워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죽음을 불과 두 달도 채 남기지 않은 때부터였고, 그때부터 더 이상 시작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기까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하루 한 편꼴로 아름답고도 가슴 먹먹한 20여 편의 유고시를 남겼다. 마치 죽음 직전에 그의 속에 갇혀 있던 시들이 난파선에서 빠져나오듯 그에게서 탈출해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장승욱의 황망한 죽음을 맞아 그를 그리워하던 지인들이, 생전에 시인이 준비하던 두 번째 시집을 그의 유고시집으로 대신 펴냈다. 그의 학창 시절 동기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가 남긴 시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찾아 모으고, 친구 최병현이 그를 대신해 편집했으며, 생전에 그가 근무했던 출판사가 흔쾌히 시집 발간을 떠맡았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출간 의의는 단지 요절한 시인과 가까웠던 지인들의 사적인 추모를 넘어서, 탁월한 언어 감각 속에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녹여냈던, 대중적으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시인을 재발견한다는 데 있다.
시집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먼저 1부는 그가 병상에서 쓴 유작 시들이다. 오랜 시간 예감해 온, 그러나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 앞에 한편으로는 투병의 의지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고뇌와 분노, 체념과 순응의 과정이 이토록 절절하고도 때로는 유쾌하게 표현된 시들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2부는 그의 첫 시집이었던 ≪중국산 우울가방≫이 나온 이후에 썼던 시들을 모았다. 이 시들은 그가 언젠가 낼 두 번째 시집을 위해 직접 정리해 둔 것들이다. 특히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한두 줄의 짧은 단형시들이 눈에 띄는데, 시구가 짧을수록 그의 언어 감각은 더욱 빛난다.
살려 줘, 살려 줘
내 온몸이 눈물 한 방울에 매달려 있다
-<역전(逆轉)>
눈물이 몸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몸이 눈물 한 방울에 매달려 있다는 발상의 전도 때문에 우리의 상황은 순식간에 목숨이 급박한 극도의 위기의 순간으로 ‘역전’되어 버린다. 그보다 더 짧은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자.
사월이 된 삼월이 벗어 두고 간 키높이 구두
-<ㅁ>
3월에서 4월로 변하는 시간의 흐름을 받침 하나 차이로 표현하는 발상은, 앞서도 말했듯이,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단어와 씨름해 온, 그만한 내공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감각은 아닐 것이다.
3부는 그가 자신의 시를 처음 사람들 앞에 내놓았던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썼던 초기작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을 모았다. 고등학교 때 그의 은사였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전영태 교수가 당시 그의 시에 대해 “너무 일찍 피어 걱정된다”고 평했을 만큼, 이 시절의 시들도 이미 습작의 수준은 훨씬 벗어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지금 다시 평가해 보자면, 그 가운데 더 좋고 덜 좋음을 나눌 수는 있겠지만, 시인이 성장해 온 흔적을 밟아 보는 것도 그의 지인들에게는 추모의 의미가 있고,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장승욱의 재발견이라는 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전영태 교수는 이 시집의 발문 겸 평도 기꺼이 맡아 주었는데, 시인 장승욱에 대한 최초의 평자가 이제 최후의 평을 한 것도 이 특별한 시집에 의미를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200자평
장승욱 유고시집. 장승욱(1961∼2012)의 황망한 죽음을 맞아 그를 그리워하던 지인들이, 생전에 시인이 준비하던 두 번째 시집을 그의 유고시집으로 대신 펴냈다. 그의 학창 시절 동기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가 남긴 시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찾아 모으고, 친구 최병현이 그를 대신해 편집했으며, 생전에 그가 근무했던 출판사가 흔쾌히 시집 발간을 떠맡았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출간 의의는 단지 요절한 시인과 가까웠던 지인들의 사적인 추모를 넘어서, 탁월한 언어 감각 속에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녹여냈던, 대중적으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시인을 재발견한다는 데 있다.
지은이
장승욱은 1961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우신 고등학교와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86년부터 1998년까지 조선일보와 SBS에서 근무했다. 이후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던 1천 종 가까운 전 세계 고전들을 펴내는 작업을 해 왔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소설과 시를 썼고, 외국 취재도 풍부하게 경험해 다녀 온 나라가 50개쯤 된다. 여행을 좋아해서 죽을 때까지 백 개의 나라를 채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으나, 소망을 채우지 못하고 2012년 1월 25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토박이말로만 된 시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대학 시절 도서관에 있는 사전을 뒤지며 토박이말 낱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으나, 1998년 토박이말 사전인 ≪한겨레 말모이≫로부터 시작해 우리말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써 왔다. 한글문화연대에서 주는 우리말글작가상과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가 주는 한국어문상(출판 부문)을 받았다. 저서로 ≪중국산 우울가방≫(시집), ≪술통≫(산문집), ≪한겨레 말모이≫, ≪토박이말 일곱 마당≫, ≪경마장에 없는 말들≫,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사랑한다 우리말≫, ≪우리말은 재미있다≫,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등이 있다.
차례
1부 나부끼다
나부끼다
중환자실 어법 1
나의 그리움
아버지 똥
문제집 아저씨의 독백
우탄트
박영석 대장(隊長)
가로지르다
툭
피로 맺은 친구들
중환자실 어법 2
올 것이 왔다
덜커덩 내 인생
눌공에게
모르겠다
나는 왜
춤추다
용가리 통뼈
얼레리 아저씨의 한나절
비
1000원 이야기
상실
2부 가나다
투신 1
역전(逆轉)
영어로 인사하기
땅땅거리다
도대체 동문서답
일편단심
멈춰 서서 웃었다
잡채
아무래도
진실, 희망 그리고 절망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 대답하다
오자를 발견하다
시인들, 왕년의
이사할 때 보니
활자와 출판사
‘살 활(活) 자’를 들여다보았다
계란 프라이
시에 쉬를 싸다
당구
안개
완전범죄는 가르친다
알 수 없는 인생
유통기한
불면
벚나무 응원가
투신 2
출근길, 완행으로 걷다
헐렁헐렁
몰랐다 몰랐다
섬
테트리스 1
테트리스 2
나날
검은 철대문
의자
회사원
쉼표(,)
칠흑
인사하자
감나무를 봤다
ㅁ
목련
며칠 사이
어느 날의 발견
뉴스에도 안 나오는
개나리
스위치
반찬 그릇
봄 여름 가을 겨울 1
봄 여름 가을 겨울 2
가나다
찢어진 가죽 소파의 안을 들여다보면
3부 나무
한강
편지
풀잎
나무
동행을 위하여
봄 속에도 남아 있는 겨울
고독
꿈
휘파람
입석버스에서
백마강
어느 날 너에게
밤빗소리를 들으며
줄 – 둘
줄 – 아홉
사랑
발문, 술과 말과 시를 가로지르다
추모, 그리고 편집 후기
시인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왜 더 과격하지 못했을까
내 안의 붉은 핏방울들 터뜨려
세상을 물들이지 못했을까
스스로 만들어 낸 갖가지 핑계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직진보다는 늘 우회로 표지가
먼저 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왜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을까
얼어붙은 산맥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고난과 신산(辛酸)만이
내 운명으로 주어질지라도
그곳에 가야 했다는 쓰디쓴 후회!
나는 왜 더 과격하지 못했을까
언제나 세상의 비위를 맞추며
빙충이처럼 살아왔을까
내 안에 흐르는 붉은 피를 외면하면서
-<나는 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