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타인은 누구인가?
젤레르의 〈타인(L’Autre)〉에는 한 여자(그녀)와 두 남자(그, 타인)가 나온다. 작가는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독자/관객은 거의 끝부분에서 ‘그’의 이름이 장(Jean)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전반적으로 〈타인〉의 등장인물들은 정체성이 모호하다. 작가를 꿈꾸는 ‘그’와 직장인 ‘그녀’는 약혼한 사이로 5년째 함께 살고 있다. ‘타인’은 그의 절친이면서 그녀의 애인으로 나온다. 언뜻 보기에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지만 ‘그’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그’의 어머니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울러 ‘타인’도 ‘그’의 또 다른 자아, 작가의 대변인 또는 수호천사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이처럼 ‘타인’의 정체성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더욱 모호해진다. ‘그’와 그녀’에게 ‘타인’은 누구일까? ‘그’와 ‘그녀’의 관점에서 ‘타인’을 조명해 본다면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샹젤리제 스튜디오(Studio des Champs-Elysées)에서 플로리앙 젤레르가 직접 연출한 〈타인〉을 보고 로랑 테르지에프(Laurent Terzieff)는 커플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한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가 연상되는 작품으로, 한 인간 안에 공존하는 세 측면이 그, 그녀, 타인으로 표출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작품 내적 요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언급했듯, 플로리앙 젤레르는 뚜렷한 메시지를 주거나 지나치게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는 방식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얽혀 있는 미로 속에서 헤매는 등장인물들, 〈타인〉은 익숙한 인물 구도로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를 시사하며 수수께끼처럼 여러 각도에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타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저마다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 바로 여기에 싱그러운 20대 중반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 플로리앙 젤레르의 원숙함이 깃들어 있다.
200자평
<타인>은 플로리앙 젤레르의 첫 희곡이자 첫 흥행작이다. 연인 또는 부부 사이의 미묘한 관계성을 현실과 환상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극작 스타일로 제시해 문학성과 공연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은이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 1979∼)
소설, 희곡, 시나리오, 영화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는 현대 프랑스 작가다. 파리 시앙스 포(Sciences Po)를 졸업하고 문인으로 데뷔한 후, 지금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첫 소설 《인공 눈(Neiges artificielles)》(2002)은 아셰트(Fondation Hachette) 문학상을, 2004년에 발표한 《최악의 매력(La Facination du pire)》은 앵테랄리에상(Prix Interallié)을, 세 번째 희곡 〈네가 만약 죽는다면(Si tu mourais…)〉은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젊은 극작가상(Prix du Jeune Théâtre)을 받았다.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섯 개 부문(작품상, 편집상, 미술상…)에 노미네이트되고 각색상과 남우조연상(앤서니 홉킨스)을 비롯해 이듬해 세자르 외국영화상을 수상한 〈아버지(The Father)〉에 이르기까지 젤레르는 데뷔 시절부터 평단과 독자,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희곡은 발표작마다 흥행에 성공하며 40여 개 나라에서 공연되는 행운을 누렸고 〈아들(Le Fils)〉(2018)은 세계 각지에서 50편 이상의 연출로 재탄생되었다.
옮긴이
권현정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유럽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프랑스 무대미술의 형태 미학〉, 〈연출의 탄생〉, 〈메테를랭크의 일상의 비극 : 내부〉, 〈라가르스의 세상의 끝일 뿐 또는 소통의 실패〉, 〈무대미술의 관례성-맨션에서 임의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Maeterlinck et le théâtre pour marionnettes〉, 〈젤레르의 타인에 나타난 경계의 모호성〉 등이 있다. 역서로는 1975년부터 2015년까지 무대미술의 변천과 의미를 다룬 《프랑스 시노그라퍼(Scénographes en France)》(뤽크 부크리스, 마르셀 프레드퐁 외 공저), 《마테를랭크의 인형극(Trois petits drames pour marionnettes)》, 《나는 사라진다 / 나의 그 무엇도(Je disparais / Rien de moi)》(아르느 리그르 저), 《시노그라피 소론(Petit traité de scénographie)》(마르셀 프레드퐁 저)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 떠도는 그림자들
2. 알쏭달쏭한 바리케이드
3. 전쟁하는 소리(또는 커플 전쟁)
4. 고독한 사람
5. 은밀한 질투
6. 자살하려는 사람
7. 환심을 사려는 사람
8. 비극적 드라마
9. 피날레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 : 이곳에서는 사랑이 식지 않을 거야.
그녀 : 어떻게 확신해?
그 : 규칙을 세우면 돼.
그녀 : 규칙?
그 : 응. 사랑이 식지 않는 규칙. 함께 살다 보면 사랑이 식을 수 있지만, 너와 나의 공간, 두 영토의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면 돼. 그래. 규칙을 세우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잘될 거야.
그녀 : 어떤 규칙?
그 : 첫째.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자지 않을 거야. 함께 자면 각자 잠 속에 빠지게 되고 상대에게 어울리지 않게 되니까…
그녀 : 잠을 같이 안 잔다고?
그 : 음. 안 그러면 어느 날 감기에 걸린 네가 코를 골겠지. 그럴 수 있어. 그러면 나는 한밤중에 조용히 너를 싫어하기 시작할 거야. 맞아. 어느 날 네가 코를 골든지 내가 코를 골 테고, 그러면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되는 거지. 우리의 돼지 본성을.
15쪽
타인 : (비웃는 걸 감추려고 하면서) 친구가 없으세요?
그 : 네.
타인 : 한 명도 없어요?
그 : 모두 떠났어요.
타인 : 어디로요?
그 : 어디로 떠난 게 아니고 그냥 사라졌어요.
타인 : 사라졌다? 어떻게요?
그 : 곁에 있었는데 어느 날 없어졌어요. 아주 단순한 거죠.
타인 : 사라져 버렸어요?
그 : 갑자기 사라진 건 아니에요. 아니죠. 천천히 일어난 일이에요. 제 말을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슬며시 일어났어요. 점차적으로 생긴 일이에요. 처음에는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전화도 뜸해지다가 각자 충분한 이유가 있었죠. 인생이라는… 그러다가 서로 말하지 않게 됐어요. 연락하지 않게 됐죠. 그리고 매우 상투적으로 변했고. 더 이상 넘치는 열정도 없고.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그래요. 사실 천천히 일어난 일이에요. 고독이 갖고 있는 지독한 사악함이라고나 할까요. 고독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순간 비로소 고독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니까요.
28-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