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로스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종족을 번성시키려는 욕구이자, 참된 것[眞], 훌륭한 것[善], 아름다운 것[美]을 통해 자신을 확대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만들어내는 직접적 충동이며, 근원적 추진력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유한한 인간이 아직 갖지 못한 것을 항상 욕구하고 사랑하며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며,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끊임없이 열어주는 창조적 생명력이다.
그러나 에로스 자체는 맹목적 충동일 뿐이며, 지성(nous)에 의해 올바른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성이 에로스에게 제시하는 목표가 곧 이데아이며 이상(Ideal)이다. 이데아는 그 자체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충동에 의해 비로소 찾아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아가 없는 에로스는 맹목적 광기(狂氣)에 불과하고, 에로스가 없는 이데아는 공허한 화석(化石)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데아는 가령 동전의 일정한 가치를 나타내는 앞면이라면, 에로스는 그 동전이 결코 위폐가 아님을 입증해 주는 뒷면과 같다. 결국 플라톤 철학의 창조적 열정을 대변하는 에로스를 전제하지 않고는 그의 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실천적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조차 없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불교는 이 사랑의 조금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비(慈悲)를 실천하라고 부단히 역설해 왔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과 현실은 이에 비례해 이 위대한 가르침으로부터 더 멀어져만 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혹시 이러한 물음을 해결할 실마리를 가장 이론적인, 따라서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문제로부터 찾으려 한다면, 플라톤의 철학 즉 그의 ≪향연≫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200자평
플라톤의 철학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아가톤이 비극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해 함께(sym) 먹고 마시는(posium) 만찬장에서 참석자들이 각기 사랑의 신 에로스(Eros)를 찬미한 것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대화편이다. 진·선·미의 인간이 인간다움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국가≫와 더불어 가장 탁월한 대화체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책의 특성을 생생하게 살리기 위해 다소 생소한 구어체로 번역했다.
지은이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으로 태어나, 당시의 관례대로 정치가가 되려 했으나, 20세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7세에 스승이 부당한 재판의 결과 사형을 당한 후 정치적 탄압을 피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도 받았다. 시라큐스에서 정치개혁에 관여했지만 음모에 빠져 노예로 팔려가다 친지의 도움으로 해방된 후,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워 정치가 아닌 청년교육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약 30여 편의 ‘대화편’과 몇 권의 편지를 남겼는데, 이 책 이외에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메논≫(Menon), ≪파이돈≫(Phaidon), ≪국가≫(Politeia), ≪소피스테스≫(Sophistes), ≪티마이오스≫(Timaios), ≪법률≫(Nomoi) 등이 있다.
이 ‘대화편’들은 진리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생생한 대화체의 형태로 재현해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화와 상징 그리고 풍부한 비유를 담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웅장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그는 이데아(idea)에 대한 탐구를 통해 가능한 한 영혼을 훌륭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자 보람된 행복이라며 영혼의 완성을 역설한 소크라테스의 새로운 도덕을 개인의 차원에서 지성이 지배하고 정의가 구현되는 국가와 자연의 차원으로 확장해, 진리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 이상적 관념론(Idealism)을 제시한 선구자이다. 이러한 평가는 화이트헤드(A.N. Whitehead)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 시대의] 각주(脚註)”라고 말하듯이, 또한 서양사상의 전통이었던 대수학적 평면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의 기하학적 입체적 사고에 대해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나 첨단 유전공학자들이 매우 경탄하듯이, 서양의 모든 학문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결정적 영향을 지금도 강력하게 행사하고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옮긴이
이종훈(李宗勳)은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춘천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와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현대의 위기와 생활세계≫(동녘, 1994), ≪아빠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현암사, 1994, 2006) 1∼3권,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한길사, 201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시간의식≫(한길사, 1996),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한길사, 1997), ≪경험과 판단≫(민음사, 1997), ≪데카르트적 성찰≫(한길사, 2002),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한길사, 2007) 1∼3권,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한길사, 2019), ≪현상학적 심리학≫(한길사, 2013), ≪논리연구≫(민음사, 2018) 1∼3권, ≪수동적 종합≫(한길사, 2018), ≪제일철학≫(한길사, 2020) 1∼2권, ≪상호 주관성≫(한길사, 2021) 등이 있다.
차례
만찬장으로 가는 길
만찬이 열림
신화, 시, 관습, 의술을 통해 에로스를 찬미함
에로스의 본성과 업적을 찬미함
에로스를 찬미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에로스에 대한 디오티마의 암시
소크라테스의 인간 됨됨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에로스는, 전체로 보면, 다양하고 위대한, 아니 전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제와 정의를 통해 인간이나 신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주는 에로스야말로 가장 위대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인간들끼리 또 인간보다 더 높은 신들과 잘 사귀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43쪽
그런 다음 제우스는, 마치 저장 식품을 만들려 과일을 쪼개 가르듯이 또 삶은 달걀을 머리카락으로 자르듯이, 인간을 둘로 쪼갰습니다. 제우스는 이렇게 쪼갠 인간의 얼굴과 목의 반쪽을 모두 쪼개진 방향으로 돌려놓으라고 아폴론에게 지시했습니다. 인간이 항상 자신의 쪼개진 상처를 보면서 좀 더 온순해지기 바랐기 때문입니다. 또 쪼개진 부분을 치료하라 아폴론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아폴론은 인간의 얼굴을 돌려놓고, 몸 전체의 피부를 지금 우리가 배[腹]라 부르는 부위로 잡아당겨, 마치 돈주머니를 묶듯이, 배 중앙에 주둥이가 만들어지게 졸라맸는데, 이것이 곧 배꼽입니다. 그리고 남은 주름살의 대부분은, 제화공이 나무 모형 위에 가죽을 놓고 펼 때처럼, 도구를 사용해 펼친 다음 가슴에 붙였습니다. 그 주름살의 약간은 배꼽 주변에 남겨놓았는데, 이건 인간이 과거에 자신이 처한 상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47~48쪽
우리가 이제껏 동의한 대로, 만약 사랑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영원히 가지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죽지 않는 것을 좋은 것과 함께 욕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죽지 않음[不滅]에 대한 갈망이랍니다.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