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김영랑의 초기와 중, 후기 시 세계는 큰 편차가 있다. 1930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초기 시편은 그의 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마음”의 감각과 미의식이 주조를 이룬다. 그의 시 세계에서 마음은 지성적인 사고 이전 전일적인 미분성의 대상으로서 순수 자아의 근원 심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의 마음의 노래에는 시대정신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려하고 순화된 미감이 드러난다. 그에게 역사적 현실의 고통은 마음의 노래의 비애와 슬픔의 정조로 내면화되어 추상적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의 전통적 미학에 해당하는 ‘엇’ 혹은 ‘촉기’의 미의식이 초기 시편의 창작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박용철이 김영랑의 시 세계에 대해 지적했던 바처럼, “세계의 政治經濟를 變革하려는 類의 野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근원적인 “우리의 신경을 변혁시키려는 야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39년부터 1940년 그리고 해방 이후에 해당하는 중, 후기에 이르면 시대정신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전면에 부각되고 순연한 “마음”의 미의식과 감각은 휘발되고 만다. 일제 말 가혹한 탄압과 해방 이후 혼란상이 그의 순수 자아의 마음의 노래를 파탄시킨 형국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의 시적 삶에서 사회성과 역사의식을 풍요롭게 획득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의 시 세계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미적 수용과 형상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 채 산문 지향적인 직서적 서술과 비탄에 그치는 양상을 드러낸다. 특히 후기 시편에 오면 해방정국의 극심한 혼란이라는 ‘배반된 희망’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으로 인해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면모를 보인다. 그의 시적 삶은 현실 부정의 정신을 스스로 날카롭게 다듬으면서 특유의 정서적 감성과 ‘시대적 리듬’을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신생의 길을 열어 가야 하는 국면에 이른 것이다.
200자평
시단에 등장한 이래 1950년 작고하기까지 그가 남긴 87편의 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시어는 “마음”이다. 1930년대 시문학파의 중심 멤버였던 그의 시 세계가 추구한 마음의 세계는 지성적인 요소가 스며들기 이전의 ‘투명하고 자연발생적인’ 근원심상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 책은 순수 서정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를 소개한다.
지은이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은 전남 강진에서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식(允植)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아호인 영랑(永郞)을 사용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시작 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 주었다. 광복 후 은거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해 고향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해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다.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다. 1949년 전남 강진에서 서울로 이사한 이듬해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0년 9·28 당시 서울에서 유탄을 맞고 사망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광주광역시의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엮은이
홍용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젊은 평론가상, 시와시학상, 애지문학상, 유심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겸 경희사이버대학원 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김지하 문학 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등이 있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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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가야금
달마지
연
五月
毒을 차고
墓碑銘
한 줌 흙
江물
한길에 누어
偶感
호젓한 노래
집
春香
북
바다로 가자
놓인 마음
새벽의 處刑場
絶望
겨레의 새해
연
발짓
忘却
感激 八·一五
五月 아츰
行軍
앞허 누어
池畔 追憶
어느 날 어느 때고
千里를 올라온다
五月 恨
琴湖江
예−ㅌ스(W. B. YEATS) 詩篇
나치 反抗의 노래
나치 反抗의 後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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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게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업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히 맺는 이슬가튼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엇다 내여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ㅅ마음은
-<내 마음을 아실 이>, 46쪽.
●
내 가슴에 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毒
벗은 그 무서운 毒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毒이 벗도 선뜻 害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毒 안 차고 살어도 머지않어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屢億千萬 世代가 그 뒤로 잠잣고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虛無한듸!” 毒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虛無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숭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毒을 품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야.
-<毒을 차고>,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