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6·25 전쟁 시기 피란지 대구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김종삼은 정전 협정이 체결되던 1953년 종합 잡지 ≪신세계≫에 시 <원정(園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과작이었다. 1984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십이음계≫(삼애사, 1969), ≪시인 학교≫(신현실사, 1977),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 1982) 이렇게 단 세 권의 시집을 펴냈을 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시 세계는 완고한 평면에 갇혀 있었다. 김춘수를 필두로 김현, 황동규, 이승훈, 김우창, 이경수 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김종삼 시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 김종삼의 시는 순수시, 예술지상주의, 미학주의, 보헤미안 정서 등 정치·사회적 의식으로부터 거리가 먼 모더니즘 시로 분류되고 있었다. 김종삼의 시가 재조명을 받게 된 계기는 1984년 시인의 영면과 1988년 ≪김종삼 전집≫(장석주 편, 청하)의 간행이었다.
김종삼의 시는 낙원(고향)에서 추방된 자가 없는 (좋은)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고난의 여정이다. 그의 시적 주체는 두 발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두 발은 지옥과 같은 세속 도시를 밟고 있으면서도 두 눈은 천상의 세계,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굳건하게 지켜 낸 선배 예술가를 추모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과 대면하는 것으로 삶을 채워 나갔다. 타자 추모와 자기 애도는 메시아 콤플렉스,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확대되었고, 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지상에 없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희구한 김종삼 시의 지도는 평화, 그것도 불멸의 평화에서 정지했다.
김종삼의 시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모더니즘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디스토피아의 안에서,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동경한 ‘내국 디아스포라’의 자기 고백이자 상상이었고, 간절한 기도였다. 그는 예술가를 추모하고, 자신의 삶 혹은 죽음을 애도하면서 끝끝내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생의 끝에서 그는 시인이 평화로 가는 길을 열어 나갈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 시인은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김종삼 시의 여정은 불멸의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정지했다. 그래서 그의 시 지도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는 독도법이 서툰 우리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시가 무엇이냐고. 누가 진정한 시인이냐고. 평화, 불멸의 평화는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 답을 찾아내는 지난한 작업은 김종삼의 시와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추모하는 동시에, 그가 그랬듯이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지 모른다.
200자평
시의 이름으로 물질 만능주의에 저항했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부도덕한 사회와 맞선 시인이 있다. 현실과 타협할 줄 몰랐던 그는 시와 음악, 술과 벗들의 힘으로 산업 자본주의 문명의 ‘희박한 산소’를 견디다가 끝내 떠났다. 식민지와 해방 공간, 전쟁과 분단, 근대화 과정에서 질식사한 시인, 바로 김종삼이다.
지은이
김종삼(金宗三, 1921∼1984)은 1921년 3월 황해도 운율에서 아버지 김서영과 어머니 김신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장남이 시인 김종문).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했다.
193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7세 되던 1938년, 도쿄 도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학해, 1940년 졸업한다. 그의 일본 유학은 부모나 주위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작곡을 하고 싶어 자의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의 시와 삶에서 클래식 음악이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이때의 결심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942년 그가 도쿄문화학원 문학과에 들어가자, 법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길 원하던 아버지가 지원을 끊어 버렸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되어 귀국할 때까지 신문팔이, 부두 하역부 등 막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문화학원 문학과는 1944년 중퇴했지만, 이 시기 그는 도스토옙스키,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을 탐독하는 한편 클래식 음악에도 심취했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서양 예술과 일본의 고급 문화를 경험한 그에게 해방 직후의 고국은 적응하기 힘든 혼란스런 세계였다. 좌와 우가 갈려 맞부딪치던 해방 공간. 남과 북은 각각 정부를 세웠고, 마침내 동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김종삼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폐허 위에서였다. 서울 명동에서 어울리던 문인과 예술가는 피란지 부산과 대구에서 다시 모였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김종삼은 개인적 비극과 마주친다. 절친했던 벗 전봉래(시인 전봉건의 형)가 1951년 2월, 피란지 수도 부산에서 자살한 것이다.
김종삼은 1953년 ≪신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기 시작한 시”였지만, 당시 문단에서는 그의 시를 불편해했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시를 ≪문예≫에 추천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 ‘꽃과 이슬’을 쓰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였다. 김종삼 시의 진가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한 시인은 김춘수였다.
휴전 이후 서울에 정착한 그의 직업은 음악과 연관된 것이었다. 1955년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음악 담당이란 직함을 얻은 김종삼은 1963년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 2 라디오로 통폐합됐다)에 입사해 1976년 정년 퇴임 때까지 근무한다. 1956년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지만 그는 성실한 생활인은 되지 못했다. 직장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생의 후반기에는 가정을 이끌지도 못했다.
정년 퇴임 이후 그의 삶은 불우했다. 가족의 부양은 물론 자신의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알코올 중독이었다. 1982년 세 번째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전후한 시들이 이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시 속의 죽음과 현실의 죽음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시인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군부 독재가 신군부로 넘어가던 시대, 자본주의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던 고도성장 시대, 시인의 몸과 마음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매일같이 스스로 죽고 있”던 그는 마침내 1984년 8월 9일 영면한다.
엮은이
이문재(李文宰)는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1982년에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 ≪산책 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가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격월간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해가 머물러 있다
그리운 안니·로리
돌각담
園丁
받기 어려운 선물처럼
쑥 내음 속의 童話
라산스카
復活節
마음의 울타리
올페의 유니폼
어둠 속에서 온 소리
이 짧은 이야기
여인
五학년 一반
물桶
라산스카 2
나의 本籍
背音
무슨 曜日일까
미사에 參席한 李仲燮 氏
音樂
屍體室
墨畵
스와니 江이랑 요단 江이랑
북 치는 소년
往十里
비옷을 빌어 입고
술래잡기
文章 修業
샹뼁 1
앙포르멜
드빗시 山莊
아우슈븨츠·Ⅰ
엄마
고장 난 機體
달 뜰 때까지
올페 1
기동차가 다니던 철뚝길
虛空
掌篇·1
올페 2
掌篇·2
걷자
스와니 江
對話
民間人
고향
漁夫
破片
聖河
掌篇·3
한 마리의 새
두꺼비의 轢死
詩人 學校
序詩
앞날을 향하여
詩作 노우트
그날이 오며는
앤니로리
또 한 번 날자꾸나
라산스카
實記 1
추모합니다
소금 바다
풍경
운동장
制作
글짓기
아데라이데
내가 재벌이라면
소공동 지하상가
아침
행복
掌篇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死別
前程
極刑
라산스카
오늘 1
나 3
(無題) 2
1984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 짧은 이야기
한 걸음이라도 흠잡히지 않으려고 생존하여 갔다.
몇 걸음이라도 어느 성현이 이끌어 주는 고되인 삶의 쇠사슬처럼 생존되어 갔다.
아름다이 여인의 눈이 세상 욕심이라곤 없는 불치의 환자처럼 생존하여 갔다.
환멸의 습지에서 가끔 헤어나게 되며는 남다른 햇볕과 푸름이 자라고 있으므로 서글펐다.
서글퍼서 자리 잡으려는 샘터, 손을 잠그면 어질게 반영되는 것들.
그 주변으론 색다른 영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장 난 機體
해 온 바를 訂正할 수 없는 시대다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桎梏을 깨는 連山을 떠가고 있다
현대는 더 便利하다고 하지만 人命들이 값어치 없이 더 많이 죽어 가고 있다
자그만 돈놀이라도 하지 않으면 延命할 수 없는 敎人들도 있다
●그날이 오며는
머지않아 나는 죽을 거야
산에서건
고원 지대에서건
어디메에서건
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죽을 거야
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않아 죽을 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구름이 되어
양 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 거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