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나도향의 작품 경향은 일반적으로 ≪백조≫ 동인 시절의 낭만적 성향에서 점차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발전해 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처녀작 <젊은이의 시절>을 비롯한 초기작은 잦은 영탄과 감격, 그리고 감상주의가 두드러지는데, 단편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 안에 인물의 심리 묘사, 아이러니한 상황 등을 포함하는 등 세밀하고 탄탄한 플롯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뽕>,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등을 보면 여전히 낭만주의적인 격정과 원초적 본능 등이 그의 인간 묘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소설은 낭만주의적 성향과 자연주의적인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여이발사>는 콩트에 가까운 단편으로 주인공이 여이발사 앞에서 허세를 부린 결과 공연히 삼십 전을 날리고 마는 내용의 이야기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이전의 나도향 소설에 견주어보면 이 작품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세밀한 상황의 묘사,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인물의 외모, 성격에 대한 묘사의 핍진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해서 나도향의 소설은 구성과 문체, 묘사의 측면에서 작품의 완결성과 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창작해 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오십 전밖에 없는 돈으로 머리를 깎기 위해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이십 전’에 머리를 깎는 이발소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머리를 깎던 남자가 밥을 먹으러 들어가자 그의 아내인 듯한 여자가 나와 면도를 해준다. 여자의 태도에 한껏 마음을 빼앗기고 또 자꾸 웃는 그 여자 앞에서 주인공은 허세를 부리듯이 오십 전 은화를 모두 주고 이발소를 나온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앞뒤로 쓰다듬어보던 그는 그 여자가 자꾸 웃던 이유가 자기 머리에 있는 어릴 적 쑥뜸을 뜨고 난 자국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허세와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외모가 못생기고 말도 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삼룡이는 비록 벙어리이기는 하지만 충직할 뿐만 아니라 생각도 깊어서 주인 오 생원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 생원의 아들은 성정이 바르지 못해 언제나 삼룡이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 삼룡이는 비록 화가 치밀지라도 주인의 아들이 아직 철이 없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오 생원의 아들이 장가를 들고 새아씨를 얻게 되면서 삼룡이와 아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오 생원의 아들은 새아씨가 품행이 바른 데 비해 자신의 행동이 바르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말하는 것을 알고 새아씨를 미워하며 구박하기 시작한다. 삼룡이는 새아씨를 불쌍히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새아씨를 마음속으로 사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새아씨에 대한 삼룡이의 관심이 오히려 새아씨와 삼룡이 사이의 추문을 만들게 되고 결국 삼룡이는 내당 출입을 금지당한다. 몰래 내당 주위를 맴돌던 삼룡이는 결국 한밤중에 아씨의 방에 들어가 자살하려던 새아씨를 구해내지만, 오히려 삼룡이와 아씨의 관계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게 만들고 주인집에서 쫓겨난다. 센티멘털한 정서, 아씨에 대한 사랑으로 벙어리 삼룡이는 어떤 생명의 환희를 느끼곤 했는데, 그런 모든 것이 좌절되자 주인집에 방화를 하고 먼저 주인 오 생원을 구한 뒤, 새아씨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와 아씨를 내려놓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숨을 거둔다.
<벙어리 삼룡이>가 ‘낭만적 죽음’의 미적 형상화를 통해 소설의 결말을 끌어내는 점에서 낭만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면, <물레방아> 역시 현실 속에서 배반되고 좌절되는 사랑에 대한 분노가 만든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방원과 그의 처는 지주인 신치규의 소작인이다. 신치규는 그 지역에서 가장 부자이고 세력이 있는 자로 방원의 ‘처’를 탐내서 물레방아로 그녀를 불러낸다. 방원의 처는 물질적 욕망이 큰 창부형 여자로 신치규의 자신에 대한 그런 욕심을 이용해 팔자를 고치려고 한다. 방원은 아내를 찾으러 물레방아로 갔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에게 마을을 떠나자고 애원하지만 방원의 처는 ‘방원’의 애원을 뿌리친다. 분노한 방원이 결국 신치규를 돌로 치지만 곧 순사에게 잡히고 만다. 감옥을 갔다 온 방원은 그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신치규의 집을 찾아간다. 처를 불러낸 방원은 그의 처가 마음을 고쳐먹을 것을 부탁하지만 방원의 처는 오히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물질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재물에 눈이 먼 ‘처’에게 분노한 방원은 자신의 처를 칼로 찌르고 자신도 가슴을 찔러 그 위에 쓰러져 죽는다.
<뽕>은 <물레방아>에 나오는 방원의 처처럼 창부형 여자인 안협집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안협집은 재물을 위해서 남편을 배신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몸’이 ‘재물’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수단임을 알고 있는 여자다. <뽕>에서는 ‘세속적 욕망/사랑’이라는 이원적 대립구도는 오히려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소설은 ‘관능’, ‘성’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윤리 이전의 ‘생명력과 원시성’을 더 강조해서 보여주는 섹슈앨리티의 측면이 강한 작품이다. 남편 김삼보는 안협집의 행실을 알면서도 ‘돈’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모른 척한다. ‘삼돌’이라는 동네 머슴이 안협집에게 눈독을 들이면서 안협집의 행실은 동네에 더욱 크게 소문이 나고 김삼보도 더 이상은 그 소문을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김삼보와 삼돌이 사이에 싸움이 나고 그 싸움에서 삼돌이에게 오히려 수모를 당한 김삼보는 안협집에게 화풀이를 한다. 화풀이 끝에 안협집이 거의 죽은 줄 알고 급하게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온 김삼보는 어느새 깨어 앉아 있는 안협집을 보고는 약을 내동댕이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더 묵은 뒤 길을 떠난다. 결국, 김삼보와 안협집의 관계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지형근>은 나도향의 소설적 경향이 낭만주의적인 성향에서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론, 나도향 소설의 공통적 특징인 ‘여성’에 대한 관능적 시선과 여성 인물에 대한 감상벽을 지닌 주인공의 등장은 이 소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200자평
낭만주의적인 격정과 원초적 본능 등이 작품 속의 인간 묘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런 점 때문에 낭만주의적 성향과 자연주의적인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나도향의 5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지은이
나도향(1902∼1927)은 본명이 경손(慶孫)이고 필명은 빈(彬), 호는 도향(稻香)이다. 서울 청파동의 의사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나병규는 한의사였고 아버지 나성연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양의사였다. 아버지가 의사가 된 것은 할아버지 나병규의 뜻이었는데, 도향의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 노릇 하기를 싫어했으며 문학청년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도향의 성장과정에서 이런 집안의 그늘이 그의 감상벽, 방랑벽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에 뜻을 두어 중퇴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여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홍사용, 현진건, 박영희, 이상화, 박종화 등과 동인 활동을 했고,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다. 같은 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했고, 이어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했다.
1923년에 <은화 백동화>, <17원 50전>,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에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을 발표했다. 1926년 일본에 다시 건너갔으나 건강 때문에 귀국한 뒤 며칠 후(1927. 8. 26) 사망했다.
초기에는 주로 작가의 자전적 측면에 연관된 내용을 소설로 썼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토로, 감상적인 예술가형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곧 습작기의 이런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를 벗어난 사실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장편 소설 ≪환희≫는 ≪동아일보≫의 청탁에 의한 것인데, 작자 자신도 “사색과 구상에 들어서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붓이 내려가는 대로” 썼다고 고백했듯이, 통속 소설의 취향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모호한 내면, 환상, 영탄을 사용하는 등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감상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러한 나도향의 낭만적 감상주의풍은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적인 간결함과 냉정한 시선, 객관성을 확보한 문체와 구성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소설의 단점을 극복해 낸 이런 소설적 성취는 나도향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즉,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 것과 그런 욕망이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관찰을 동시에 보여준다.
생에 대한 원초적 의지와 욕망이 사회적인 제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현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낭만적 열정과 사실주의적인 ‘관계성의 냉정한 분석’을 포함한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의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 생명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면, 이 세 작품이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나도향의 소설은 이런 일그러진 원초성, 문명 이전의 건강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특징과 가치를 지닌다.
엮은이
김춘식은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문에 당선하여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무크지 ≪무애≫, ≪시힘≫ 등과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한국문학평론≫ 등의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시 전문지 계간 ≪시작≫의 편집위원과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평론집 ≪불온한 정신≫, 연구서 ≪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 ≪한국문학의 전통과 반전통≫, ≪근대성과 민족문학의 경계≫ 등이 있다.
차례
여이발사(女理髮師)
벙어리 삼룡(三龍)이
물레방아
뽕(桑葉)
지형근(池亨根)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새앗시를 자긔 가슴에 안엇슬 때 그는 이제서 첨음으로 사러난 듯하얏다. 그는 자긔의 목슴이 다한 줄 알엇슬 때 그 새앗시를 자긔 가슴에 힘껏 끼어안엇다가 다시 그를 데리고 불 가운데를 헤치고 박가트로 나온 뒤에 새앗시를 내려놀 때에 그는 발서 목숨이 끈허진 뒤엿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새앗시 무릅에 누어 잇섯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살어젓슬는지!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우슴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열게 나타낫슬 뿐이다.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