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전쟁을 치른 1950년대 이후 한국 시단에서는 서사시라는 이름을 단 많은 시들이 창작되었다. 이것은 서사시가 근본적으로 역사 현실에 대한 민족적 발언이라는 맥락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민족적 혼란의 시기에 민족정신과 정체성을 확립 고양하고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서사시의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시인 가운데 하나가 김용호인데, 그가 서사시 형식을 빌려 내놓은 작품이 ≪남해찬가≫(남광문화사, 1952)다.
≪남해찬가≫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서사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다.
시인이 영웅의 이야기를 서사화한 배경은 전래한 민족 영웅 서사시가 의도하는 바와 유사하다. 이를테면 시인은 시집 후기에서 영웅의 일생을 서사화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1950년대 전후의 당대는 민족적 수난기다. 둘째는 대인격의 완성자이자 민족 이상의 구현자인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해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셋째는 민족 수난의 극복과 민족 이상의 실현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창작 의도와 목적은 텍스트를 구성하고 서술해 나가는 방향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일종의 화자의 이념적 시점이며, 영웅 이순신의 생애를 통해서 당대의 민족적 현실을 타개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화자의 목소리를 지배하게 한 요인이다. 이를 통해서 시인은 역사적 과거의 현재화를 실현하려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다 마침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이순신의 생애는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이다. 그의 생애야말로 국난 극복을 위한 민족의 귀감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순신은 독자라면 누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다. 시인은 이러한 집단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박힌 영웅적 주인공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자연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한다. 그러면서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인품과 덕성, 원균 등과 같은 적대자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고난과 충정을 부각하는 데 서술의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결국 이 작품이 본래 의도하는 바와 같이 인물의 생애나 업적을 찬양하는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당대의 민족적 수난을 극복하기 위한 전언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령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고려조에서 몽고의 침략이라는 국난의 시기에 고구려의 건국 영웅 동명왕을 통해 민족적 주체성과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창작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극 속에서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 이순신을 통해 국난 극복의 의지를 노래하는데, 따라서 ≪남해찬가≫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 현재의 상황에 중심을 두고 있다. 영웅 인물의 삶이 지니고 있는 위대성이나 의미를 현재화해서 당대의 문제를 돌파하려는 시인의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200자평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소설, 동화, 만화,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온갖 매체로 형상화되었고 해외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남해찬가≫는 바로 그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서사한 시다. 민족 최대의 아픔인 한국전쟁 속에서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영웅을 노래했을까?
지은이
김용호 시인은 191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8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메이지대학 신문고등연구과(新聞高等硏究科)를 수료한 뒤 귀국해 ≪선만경제통신사(鮮滿經濟通信社)≫ 기자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예술신문사≫, ≪시문학≫, ≪자유문학≫ 주간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서라벌예술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건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 한때 좌익 문학 단체에 관여한 일도 있으나 곧 전향해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했다. 1956년에는 시 <날개>로 제4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 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1973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활동은 1930년 ≪동아일보≫에 <춘원(春怨)>과 1935년 ≪신인문학≫에 <첫 여름밤 귀를 기울이다>, <쓸쓸하던 그날>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8년 ≪맥(貘)≫ 동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장시 <낙동강(洛東江)>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인은 생전에 6권의 시집을 간행했다. 이를 차례로 열거하면 ≪향연(饗宴)≫(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 별≫(1952), ≪남해찬가(南海讚歌)≫(1952), ≪날개≫(1957), ≪의상세례(衣裳洗禮)≫(1962) 등이다. 그리고 작고한 후 유작 시집 ≪혼선(混線)≫(1974)이 간행되었으며, 사후 10주기를 기념해 ≪김용호 시전집≫(1983)이 간행되었다. 그 밖에 ≪시문학입문(時文學入門)≫(1949), ≪세계명작감상독본(世界名作鑑賞讀本)≫(1953), ≪한국애정명시선(韓國愛情名詩選)≫(1954), ≪항쟁의 광장≫ (1960), ≪시원산책(詩園散策)≫(1964)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엮은이
김홍진(金洪鎭)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 ≪시와 정신≫에 평론 <부정과 전복의 시학>이 당선되어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 및 평론집으로 ≪장편 서술시의 서사시학≫, ≪부정과 전복의 시학≫, ≪오르페우스의 시선≫, ≪현대시와 도시체험의 미적 근대성≫, ≪풍경의 감각≫ 등이 있다.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序詩
第一章 混亂의 구름을 뚫고
第二章 賊은 怒한 波濤처럼
第三章 出陣의 깃발은 東을 향하여
第四章 連달아 勝戰鼓는 울고
第五章 謀害의 强風 속에서
第六章 閑山섬아 어이 네 이름이 閑山섬이냐
第七章 봄과 더불어
第八章 草溪 땅 白衣는 잠 못 이루고
第九章 微臣이 살고 아직도 열두 척이 있아옵거늘
第十章 背陸의 陣
第十一章 十一 對 三百三十
第十二章 바다는 다시 푸르건만
第十三章 陳璘인들!
第十四章 背信의 물결 위에서
第十五章 하늘을 우러러
第十六章 永遠히 民族의 이름으로
第十七章 우리들 가슴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오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를 마라
낮과 밤 엮어 낀 五 年의 세월 속에
손톱 발톱 다 닳도록 가꾸고 이룬
閑山本營의 戰船 五百 隻은-
분명
戰船과 軍兵은 거기 있었다
왼 몸, 멍들고 곳곳 상처 난 戰船 열두 척
맥이 풀려 쓸어질 듯 고누지 못하는 軍兵 백스물하나
‘이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舟師를 페하고
陸戰을 하는 것이…’
어찌 이 말이 임금 혼자만의 분부이랴
이미 없는 것과 마찬가진 것
페하고 안 페할
무슨 건덕지가 있다는 건가
그러나 보라
舜臣은 대뜸 이렇게 아뢰었다
‘戰船이 아직도 열두 척 있아오니
죽을 힘 다하여 싸운다 하올진대
이로써 오히려 넉넉다 하오리다
微臣이 안 죽고 살아서 있는 限엔
賊인들 손쉽게 덤비지 못하옵고
우리를 깔보지 못할 줄 아룁니다’
아직도
戰船이 열두 척 있어
넉넉다 하는 舜臣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야
어찌 賊이 덤빌 것이며
깔볼 것이랴 하는 舜臣
萬古에 굽힘 없는 이 氣魄을 보라
接賊不敗의 이 굳은 信念을 보라
하늘이 낸 둘 없는 이 眞勇을 보라
가없이 넓고 큰 이 自負를 보라
그리고도 오히려 남음 있어
헤아릴 길 없는 이 心境을 보라
이
모오든 걸
칼날 세워 스스로 맹서하는 舜臣
하늘이여!
산과 들이여!
바다여!
生命 있는 그 모오든 것이여!
어찌 함께 움직이지 않으랴
어찌 힘을 모아 함께 싸우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