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경제에 의한 농민의 빈궁화와 자주 발생하는 냉해와 흉작에 몰려서 홋카이도에 이주하는 개간 농민은 매년 증가했다. <방설림>은 이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렸다. 이로써 독자의 의식만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홋카이도의 황량한 자연 묘사로 서정성까지 겸비했다.
농민들은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부업을 하고, 또 농한기인 겨울에는 어장에 나가거나 목재를 베러 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생활은 팍팍했다. 소작료가 터무니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힘든 생활은 겨울이 가까이 올수록 심해졌다. 먹을 것이 없어도 지주에게 납부할 것에는 손을 댈 수 없어서 마을에 물건을 사러 갈 돈도 없었다. 모두 괴로워하고 있었다.
벼랑에 몰린 농민들은 학교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기로 한다. 그리고 집단으로 지주를 찾아가서 소작료 감면을 탄원하는 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마침내 마을 농민들은 말 썰매를 끌고 기세를 올리며 지주 집을 향해 간다. 하지만 이러한 기세는 경찰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진다. 농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경찰에 잡혀간다. 이미 경찰서에 와 있던 지주는 모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이러한 지주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농민들은 지주와 경찰의 관계를 알게 된다. 결국 농민들은 경찰서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마을로 돌아온다.
주인공 겐키치는 이러한 무기력한 농민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지주 집에 불을 지른다. 그의 ‘방화’는 마을 농민들에게 현실 사회구조의 모순을 깨우쳐 주고, 농민들이 올바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행동이었다.
<방설림>은 다키지가 본격적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에 진출한 이후의 실질적인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방설림>을 완성한 뒤 출판할 예정이었지만, 구라하라 고레히토를 방문한 뒤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아 <방설림> 발표를 포기하고, 그 대신 3·15사건을 소재로 한 <1928년 3월 15일>을 쓴다. <방설림>은 다키지의 1927년 원고장(原稿帳)에 미발표인 채로 남겨져 있었다. 노트 원고는 작가가 죽은 지 14년 후인 1947년, 전집 편찬 중에 발견되었다. 같은 해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에 소개되고, ≪사회평론≫에도 발표되어, 전환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었다.
200자평
≪게잡이 공선≫의 작가,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주자 고바야시 다키지의 유고다. 다키지가 본격적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에 진출한 이후의 실질적인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농번기 농한기 할 것 없이 일을 해도 생활은 팍팍해져만 가는 홋카이도 농민들의 현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곤궁한 생활로 벼랑에 몰린 농민들은 집단으로 지주를 찾아가서 소작료 감면을 탄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기세 좋게 지주 집을 향하던 농민들은 지주와 결탁한 경찰에 의해 지독한 고문만 당하고 돌아오는데….
지은이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작가다. 1903년 아키타(秋田)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일가가 가난을 피하여 홋카이도로 이주한다. 오타루(小樽) 상업학교 시절부터 교우회지를 편집하거나 중앙 잡지에 작품을 투고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1921년 오타루 고등상업학교(지금의 오타루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1924년 학교를 졸업하고 홋카이도 척식은행 오타루 지점에 취직한다.
하야마 요시키와 고리키 등의 작품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28년 3월 15일>을 ≪전기(戦旗)≫(1928)에 게재하며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 들어간다. 1929년 북양어부의 실상을 취재하여 <게잡이 공선>을 완성한다. 1929년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이 창립되어 중앙위원이 된다. 1933년 체포되어 특고(特高)의 고문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만 29세 4개월이었다.작품으로는 <부재 지주>(1929), <동굿찬 행>(1930), <공장세포(工場細胞)>(1930), <전형기의 사람들(転形期の人々)>(1931), <누마시리 마을>(1932), <지구의 사람들(地区の人々)>(1933), <당 생활자(黨生活者)> 등이 있다.
옮긴이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같은 대학 대학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연구과정과 간사이대학 대학원 박사전기, 박사후기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 문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문부과학성 국비유학생이었다. 스미토모재단 외국인 연구원을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에서 교육부 박사 후 과정을 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와 전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주요한 연구 분야는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과 한일비교문학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고바야시 다키지 ≪게잡이 공선≫의 성립>, <고바야시 다키지 ≪게잡이 공선≫의 복자(伏字)>, <현월 ≪그늘의 집≫−욕망과 폭력>, <고바야시 다키지의 ≪방설림≫과 최서해의 ≪홍염≫ 비교연구> 등이, 저서로는 201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된 ≪고바야시 다키지 문학의 서지적 연구≫(2011)와 ≪재일한국인 문학 연구≫(2011), ≪현월 문학 연구≫(2016), ≪고바야시 다키지 문학 연구≫(2018) 등이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방설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농민은 뒤에서 힘껏 버티는 소 같았다. 이치에는 맞다고 생각해도 좀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겐키치는 그런 구차하고 엉거주춤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는가.’
−98쪽
추위가 바싹바싹 거적 위에서부터 그 밑의 외투를 통해, 옷을 통해, 셔츠를 통해 피부로 직접 푹 찔러 왔다. 외투에는 가루 같은 눈이 하나하나 결정이 되어 반짝반짝 붙어 있었다. 손끝과 발끝이 아플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콧구멍이 얼어붙어, 입속도 귓속도 콧속도 차게 굳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깨질 것 같이 얼얼했다. 모두가 탄 말 썰매는 잡목림의 가로수가 계속되는 곳으로 나왔다. 그것은 이시카리강 가를 따라 있는 숲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길을 헤매지 않고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반쯤 죽을 뻔한 상태로 길을 헤매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어처구니없이 지난밤에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같이 평평하기에 방향을 어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27~128쪽
갑자기 마을이 떠들썩해졌다. 그러자, “불이다! 불이다!”라고 외치면서 정류장 쪽으로 두세 명이 달려갔다.
밖에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 어두운 하늘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높이가 3미터나 되는 불길이 뿜어 올랐다. 빠지직빠지직 무언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있는 동안에 시내의 집도 나무도 한쪽 편만이 흔들거리는 빛을 받아 새빨갛게 되어 명암이 또렷이 생겼다. 마을을 달려가는 사람의 살기를 띤 얼굴이 하나하나 빨간 잉크를 뿌린 듯이 보였다.
(…)
“지주네가 아닐까.”
“음 그런지도 모르겠네.”
“어머나 어머나.”
달려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지주네야. 지주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갔다.
“지주네면 내버려 둬.”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앙얼을 입은 거야.”
−142~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