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게오르기 플로롭스키의 ≪러시아 신학의 여정≫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러시아정교회의 지성이라는 그의 명성을 공고히 해 준 역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파리에서 쓰인 이 책은 초기 기독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정교회 전승의 모든 역사에 대한 작업의 완결판이다. 이 책은 엄청난 박식함과 종교적·역사적 세계관을 표현해 낸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대의 교부들로부터 판단의 규범과 기준을 받아들여 러시아정교회 역사의 살아 있는 현실, 그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에 적용했다.
저자는 순수하게 신학적인 작품들에 제한하지 않고 정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헌을 다룬다. 고대 루시가 비잔틴에서 기독교의 유산을 받아들인 시기부터 혁명 이후 러시아 정신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1930년대까지를 일관된 시선으로 조망한다.
러시아 신학의 역사는 크게 여덟 시기로 구분된다. 그 첫째는 10∼16세기다. 루시의 세례와 타타르의 침입, 수도원의 부흥, 이오시프주의자와 자볼시치의 논쟁이 그 시대의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들로 기록된다. 러시아가 비잔틴의 유산을 받아들여 주변 문화와 관계를 갖기 시작한 이 시기는 플로롭스키가 러시아 역사의 비극으로 인식한 비잔틴과 단절하며 마무리된다.
둘째 시기는 17세기다. 동란과 교회 대분열의 시대다. 이 시기를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모순된 것으로 묘사한다. 그가 러시아의 고질적인 영적 질병으로 진단한 종말에 대한 예감과 분위기가 시작됐다.
셋째는 18세기다. 표트르가 단행한 대개혁의 시기다. 표트르 개혁의 본질을 서구화가 아닌 세속화로 규정하며 국가의 교회 통제와 종속화의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그러한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 고사 위기에 놓이게 된 러시아정교회는 역설적이게도 수도원 운동의 발흥으로 영적 생명력을 얻게 된다.
넷째 시기는 러시아의 서구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전반의 알렉산드르 시대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성경협회의 성서 번역이다. 또한 설교와 신학 교육을 통해 당시 러시아정교회에서 탁월한 영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필라레트의 인격과 활동에 많은 장을 할애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결실들로 성서 신학의 확립, 신학과 철학의 결합, 역사의식의 각성을 든다.
다섯째 시기는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철학 사상의 개화기다. 다양한 서클들의 발흥과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대립에서 시작해 키레옙스키·고골·호먀코프·도스토옙스키·레온티예프·솔로비요프·표도로프 등 정교회와 연관을 맺은 작가와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일별한다. ‘교회성’이라는 일관된 규준을 가지고 이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독창적으로 평가한다.
여섯째 시기는 대개혁 이후 19세기 후반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다. 개인의 삶을 통해 시대의 첨예한 문제를 드러낸 인물로 톨스토이와 포베도노스체프를 주목한다. 특히 이때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색채를 띤 다양한 종파의 탄생과 도덕주의 경향으로 러시아 신학이 위기를 맞이한 긴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곱째 시기는 영적인 삶에 대한 종교적 관심이 급증한 세기말이다. 페테르부르크 종교·철학협회의 활동과 상징주의에 속한 다양한 시인들, 그리고 종교철학자들의 사상을 정교회와 연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망한다. 이 시기를 솔로비요프와 독일 이상주의가 지배한 시대로 파악하면서 심리주의와 미학주의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마지막 여덟째는 혁명 이후 시기다. 이 부분에서 플로롭스키는 역사적 대격변을 겪은 후 앞으로 러시아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남겨진 과제에 대해 성찰하며 러시아 신학의 부흥을 촉구한다.
200자평
≪러시아 신학의 여정≫은 기념비적 작품이고 러시아 정신 문화사의 중요한 안내서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 러시아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한다. 러시아정교회와 신학, 정신의 역사에 대한 깊은 혜안과 폭넓은 이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보편적 문화 창조라는 사명에 대한 성찰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 자산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했으며, 그중 1권은 제V장까지 수록했다.
지은이
게오르기 플로롭스키(Георгий В. Флоровский, 1893~1979)는 20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정교회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오데사의 노보로시스크 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한 후, 1920년에 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프라하로 망명하게 되고, 그곳에서 게르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신학 분야에서 플로롭스키는 뛰어난 독학자였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교부 연구에 매진해 교부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점차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당시 해외로 망명한 종교적 인텔리겐치아 대다수와는 달리 세속 철학이 아닌 신학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잠시 ‘유라시아주의’와 관련을 맺기도 했는데, 서구와 서유럽 철학에 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조심스러운 부정적 태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1926년, 갓 생겨난 파리 신학교의 교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2년에 서유럽을 총괄하는 대주교의 성직을 받게 되어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신학의 여정≫(1937)을 출판했다.
1939년 여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목격했다. 전쟁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 머물렀다가 프라하를 거쳐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다. 이미 교부학 강좌를 다른 교수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윤리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48년에 미국의 대주교 페오필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이주해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후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학장으로 있었던 1948년부터 1955년 사이 신학교의 개혁에 열성적으로 착수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동시에 권위를 인정받은 정교회 신학자로서 유니온 신학교,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논문을 저술하는 등 미국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브루클린에 있는 성 십자가 그리스정교회 신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은퇴 후에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서 강의를 계속했다. 학자와 교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수많은 예배를 집전하고 설교를 하는 등 정교회의 충실한 사제이자 영적 안내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 1979년 8월 11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옮긴이
허선화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노어노문학과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전공으로 택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성서의 상호 텍스트성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썼다.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 러시아문학 연구소(일명 푸시킨 연구소)에서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권위자인 발렌티나 베틀롭스카야(В. Е. Ветловская)의 지도를 받아 도스토옙스키 미학의 여러 문제들을 정교회 콘텍스트 속에서 연구한 박사 논문을 썼다. 귀국 후에는 고려대학교와 부산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역사 등을 주로 강의해 왔다. 러시아의 기독교 문화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과 함께 ‘러시아기독문화 연구회’를 만들어 매달 독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동으로 ≪바흐친과 기독교: 믿음의 감정≫(부산대학교 출판부, 2009)을 번역했다. 러시아정교회 사상가 알렉세이 호먀코프의 ≪교회는 하나다≫(지식을만드는지식, 2010)를 번역했다.
기독교 신자로서 학문과 신앙의 통합에 관심이 많다. 도스토옙스키는 서구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독교 작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심오한 기독교적 주제들을 연구하려 한다. 이 주제와 연관해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로는 <조시마 장로의 형상에 나타난 정교 이콘화 특성의 연구>, <도스토옙스키 창작에 나타난 미 인식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그리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신 인식의 변화>,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수도원 공간> 등이 있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인간 심리의 양상에도 관심이 많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자기 비하, 공상, 공포, 수치심 등의 심리적 테마를 다룬 논문을 쓴 바 있고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통한 문학과 신학, 심리학의 통합적 연구를 꿈꾸고 있다.
차례
서문
지은이 서문
I. 러시아 비잔틴주의의 위기
II. 서구와 만남
III. 17세기의 모순
IV. 페테르부르크의 대개혁
V. 신학을 위한 투쟁
책속으로
고대 러시아 정신의 사상적인 폐쇄성은 내적인 어려움의 결과 내지는 표현이다. 그것은 문화의 진정한 위기, 러시아 정신에 있는 비잔틴 문화의 위기였다. 러시아의 민족적·역사적 자기규정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비잔틴의 전통은 중단되었고, 비잔틴의 유산은 버려지고 절반은 잊히고 말았다. 이러한 ‘그리스 전통’의 거부야말로 모스크바 문화가 맞이한 위기의 발단이자 본질이다.
-8쪽
그 시기 신학은 살아 있는 뿌리와 절연되어 있었다. 경험과 생각은 지나치고 위험하게 분리되었다. 키예프 석학들의 시야는 상당히 넓었고, 유럽과 맺는 관계는 매우 생동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구의 새로운 운동과 탐구에 대한 소식은 키예프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에는 숙명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가짜 종교의식과 가짜 정교회 사상이 싹텄던 것이다.
-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