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박정만은 첫 시집 ≪잠자는 돌≫(1979) 이래 생전의 마지막 시집 ≪슬픈 일만 나에게≫(1988), 그리고 ≪박정만 시화집≫(1988)과 유고 시집인 ≪그대에게 가는 길≫(1988) 등 광기로 써 내려간 열 권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시에 ‘취해’ 살아왔다.
그는 1970∼1980년대에 걸쳐 독특한 서정의 영역을 개척한 시인으로,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다양한 시의 양상을 보여 주면서 특유의 시 세계를 형성한 시인이다. 이러한 시 세계는 시인이 겪은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기점으로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고전 정신을 계발하던 시인의 내면은 시대의 폭력성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생래적 고독감이 심화되어 허무감에 젖기도 하는 등 점차 비극적 서정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광기에 사로잡혀 때로는 섬뜩한, 때로는 청승맞은 편편의 시를 장식해 나갔다. 광기로 써 내려간 비극적인 서정의 밑변에는 토속적인 가락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 준다. 박정만만큼 서정과 가락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벼려, 청신하고 영롱한 시를 쓴 시인은 흔치 않다.
물질의 논리 속에서 서정의 세계를 깊이 있게 개척해 인간의 깊숙한 곳에 묻어 둔 감성을 끄집어 낸 그는 개성적 서정 미학의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가 이성적 사유 영역을 벗어나 ‘광기’를 통해 정신적 내부 세계를 보여 준 점은 현대 시를 이해하는 지평을 넓혀 주면서 동시에 현대 시의 새로운 연구 영역에 놓인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00자평
20일 동안 500여 병의 소주를 마시며 300여 편의 시를 토해 냈다. 접신이자 광기다. 독재 정권의 고문으로 몸도 정신도 망가진 시인은 섬뜩함을 자아내는 표현으로 증오와 울분을 표출한다. 그러나 그 밑변에는 토속적인 가락이 절묘하게 결합해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 준다. 부조리한 사회와 시대 현실이 낳은 광증은 현대시의 정체성이자 현대사의 거울이다.
지은이
박정만(朴正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개성적 서정의 영역을 개척하다가 사라져 간 불운한 시인의 한 대명사다. 박정만은 194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명문이었던 전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경희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 고교생 백일장 시 부문에서 장원에 당선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문예 활동을 활발히 했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등단하고 1979년 첫 시집 ≪잠자는 돌≫을 출간하기까지 그는 당대의 민중시와 해체시라는 문학적 주류 속에서 한국적 소멸의 미학과 비애의 정서를 애처로운 가락으로 노래하며 서정시의 전통성을 계승한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생래적인 비극적 세계관을 더욱 심화해 가게 된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 어떤 죄도 없이 수사 기관에 끌려갔던 박정만은 이 사건 이후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박정만의 시 세계는 이 무렵부터 새로이 변모하게 된다. 시인은 건강한 육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스러워했던 과정에서 다양한 시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시인이 노래하던 아름다운 서정은 비극적 서정으로 심화되었으며,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 의식은 더욱 확장되어 나타났다. 또한 향토적이고 토속적이었던 시인의 내면 정조가 사회·역사적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저항하는 자세로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박정만은 불과 20여 일 만에 300여 편의 시를 쏟아 낸 시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집중적으로 쓴 수많은 시편들은 수준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서정시의 한 도달점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정만과 그의 시를 일컬어 김재홍은 “소월(素月)보다도 깊은 한이, 만해(萬海)보다도 밀도 짙은 메타포가 있으며, 미당(未堂)보다도 더 섬뜩한 광기의 시재(詩才)가 있다”라고 평한 바 있으며, 황동규는 “모더니즘을 거치지 않은 한 서정주의자가 독자적으로 도달한 경지”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박정만은 시대가 주는 폭력성이나 좌절을 깊이 있는 서정적 언어로 담아내는 한편, 풍부한 시적 감수성과 언어 구사력으로 한국적 서정시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보여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독특한 시 세계를 펼쳐 나간 그는 마지막까지 시혼을 불사르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이 열리던 날 자택에서 간경화로 작고했다.
그는 8권의 시집을 비롯해 동화집과 수필집을 남겼다. 1979년 첫 시집 ≪잠자는 돌≫을 펴냈으며, 1985년 한수산 필화 사건 이후 시집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1986. 4), ≪무지개가 되기까지는≫(1987. 10), ≪서러운 땅≫(1987. 11), ≪저 쓰라린 세월≫(1987. 12), ≪혼자 있는 봄날≫(1988. 1), ≪어느덧 서쪽≫(1988. 3), ≪슬픈 일만 나에게≫(1988. 3)를 출간했다. 특히 1987년 10월부터 1988년 3월까지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6권의 시집을 출간한 것은 한국 문학사 초유의 사건이다.
이 밖에도 주요 저작으로 동화집 ≪크고도 작은 새≫(1984)와 ≪별에 오른 애리≫(1986), 수필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1987), 시화집 ≪박정만 시화집≫(1988), 유고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1988), 유고 산문집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1991)와 ≪나는 해 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1991) 등이 있다.
엮은이
조운아(趙韻娥)는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해 <박정만 시의 시간의식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2007 개정 교육과정’과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중학교 국어 검정교과서 집필진으로 문학 단원을 집필했으며, 경희대학교 글로벌한국학교재개발실 전임 연구원으로 외국인을 위한 한국학 교재를 만들고 있다. 저서로 ≪외국인을 위한 살아있는 한국현대문화≫(공저)가 있다.
차례
산 아래 앉아
겨울 속의 봄 이야기
잠자는 돌
요즈음의 날씨
芍藥 꽃밭에서
어떤 흐린 날
箴言集
숨 쉬는 무덤
古調
雨後에
피리 Ⅳ
피리 Ⅷ
피리 Ⅻ
우리가 죽어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울보
思鄕歌
子規聲
愁心歌
說話調
處容後歌
井邑後詞
靑山別曲
樂學
六字배기
노들 강변
나의 歸巢性
溪谷에서
작은 戀歌
燈
누이를 위한 小曲
대장장이
사슬
오지 않는 꿈
어느 날의 촛불
죽음을 위하여
하염없이
井邑別詞 Ⅱ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義人의 말
오월의 遺書
瘀血을 재우며
道峰을 떠나며
다시 道峰을 떠나며
산 일 번지의 술
작은 사랑의 頌歌
오늘의 빵
오늘의 병
캘린더
구두 修繕工
投花 Ⅰ
投花 Ⅱ
깊고 푸른 밤
비뚤어진 입
기필코 한 주먹만
만일의 경우
행복한 잠덧
웃자란 어둠
보리 개떡
저 쓰라린 세월
눈물의 오후
고요한 잠으로
외로운 해석
형언할 수 없는
대청에 누워
오로지 그때
돌아온 추억
흐르는 눈물
실은 평화가 아니라 검으로 왔다
혼자 있는 밤
그리운 사람
쓸쓸한 봄날
치욕적인 藥
처절한 아침
사월과 오월 사이
쓰라린 봄날
어느덧 서쪽
머나먼 들녘
이 세상의 그물코
저 젖빛 유리로
수상한 세월 3
슬픈 일만 나에게
무슨 까닭이었을까
한 떨기 꽃
녹두빛으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저 강물 속으로
終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樂學
칼을 定하고, 이제 이내 눈을 파겠다.
아픔은 살 속 깊이 유리의 화살을 꽂고
狂暴한 저 바다에는 수천의 사금파리.
밤새도록 꼬리 치는 미친개의 울음소리.
뜬 피리의 구멍마다 귀를 막고
귀를 막고 疾風 같은 피를 듣겠다.
이제 뼈와 살도 모두 파 버리겠다.
귀뚜라미 하나에 별 하나의 殺人이
은하의 별자리마다
그만한 귀뚜라미의 내가 스미어
그러나 殺人은 하늘까지 닿지 못한다.
하늘에다 사투리로 삿대질하며
삿대질하며 이제 이내 肝膽도 싹 파 버리겠다.
살인 또 살인, 오밤중의 말,
그러나 잠이 들면 말은 이미 보이지 않고
죽은 자의 뜰 하나도 얻지 못했다.
오, 나의 목통이 통째로 울려
울음 끝에 매달리는 울음의 기쁨.
이제 저 목청의 한끝까지 피리까지
하나 남은 숨통까지 아주 싹 파고 말겠다.
●終詩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