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백거이는 일생 동안 3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겨 놓아 당나라 시인 중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이며,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백거이는 강주(江州)에 있을 때에 자신의 시가 작품을 정리 편집하면서 풍유(諷諭)·한적(閑適)·감상(感傷)·잡률(雜律) 네 부문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이 중 백거이 자신은 풍유시와 한적시를 비교적 중시했다. 풍유시는 “세상 구제”를 반영하고, 한적시는 “자기 수양”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문장은 시대에 부합하게 쓰고, 시가는 현실에 부합하게 지어야 한다(文章合爲時而著, 詩歌合爲事而作)”고 했다. 현실의 중대한 사회 문제를 직시해서 시가는 시대의 맥락과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구실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시가는 사회 모든 방면에 걸쳐 폐단을 드러내고 권문귀족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그러므로 백거이의 시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풍유시라고 할 수 있다. <신악부(新樂府)>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 등의 대표작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작품은 중당(中唐) 시기 사회 각 방면의 중요한 문제를 반영해 현실의 어두운 면과 백성의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거이의 한적시는 전원에 은거해 조용히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과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많은 작품들이 ‘낙천안명(樂天安命)’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런 시가들의 측면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포함하고 있어, 그가 한적을 추구하는 이유가 어찌할 수 없는 자아 해탈에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상시는 한순간의 시인의 감상을 노래한 것이지만, 종종 깊은 기탁감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유명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은 인구에 회자되는 백거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아이들도 <장한곡>을 이해하고 읊을 수 있었고, 오랑캐 아이들도 <비파편>을 부를 수 있었다(童子解吟長恨曲, 胡兒能唱琵琶篇)”고 한 것에서 보듯이 시인 당시에도 이미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수의 장편 시는 서사가 곡절이 있고, 소리와 색채의 묘사가 뛰어났으며 분위기의 홍탁(烘托)과 음률 면에서도 예술적인 성취가 높다.
잡률시는 백거이의 작품 중에서 작품 수가 가장 많다. 이 중 가장 작품성이 있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은 경물을 묘사한 서정성 넘치는 짧은 시들이다. 이들 시는 대부분 백묘(白描) 수법을 사용해 짧은 시편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경계를 드러내고 있어 인구에 회자하는 작품이 많다.
백거이의 시가는 기본적인 풍격이 평이하다. 이는 일상적인 시어를 사용해 일상적인 일을 묘사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시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서사와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일치해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거이는 생전에 이미 시명을 날려 중국 각지에 그의 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이후 많이 애송되는 주요 작가가 되었다.
200자평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백거이의 대표작을 모았다. 그동안 국내에는 한적시 위주로만 소개되었으나 이 시집에는 그의 풍유(諷諭)·한적(閑適)·감상(感傷)·잡률(雜律)시를 시기별로 고루 실었다. 그의 시는 동네 할머니나 어린아이조차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렇기에 더욱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지은이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일찍이 태자소부(太子少傅)의 벼슬을 지내 ‘백부(白傅)’라고 칭하기도 하며 시호가 ‘문(文)’이라서 ‘백문공(白文公)’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가다.
정주(鄭州) 신정(新鄭)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전란으로 인해 5, 6년간 유랑하는데, 이때 사회의 모순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16년(800)에 진사과에 급제했고, 18년(802)에는 발췌과고시에 갑등으로 합격해 비서성교서랑을 제수받아 원진(元稹)과 함께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후에 시단에서는 이 둘을 ‘원백(元白)’으로 칭하게 된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에는 교서랑을 그만두고 <책림(策林)> 75편을 지어 주질현위가 되었다. 원화 2년(807)에는 조정으로 돌아와 한림학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좌습유를 제수받았다. 원화 4년(809)에는 원진·이신(李紳) 등과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다. 원화 5년(810)에는 경조부호조참군을 지냈다. 원화 6년부터 8년(811∼813)까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관직을 그만두고 하규(下邽)에 머무르게 된다. 원화 9년(814)에 장안으로 돌아와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번진(藩鎭)의 반란이 일어나고 자객이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백거이는 앞장서서 재상을 살해한 자객을 체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신들은 그가 간관의 직무를 뛰어넘는 월권을 했다고 비판한다. 이때에 또 어떤 이가 이 기회를 틈타 그의 어머니가 꽃구경을 하다 우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는데 <꽃을 구경하다(賞花)>·<새 우물(新井)>과 같은 시를 지어 예교를 어겼다고 모함해 강주(江州)자사(刺史)로 좌천당했다. 중서사인 왕애(王涯)가 상소를 올려 백거이가 군(郡)을 다스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자, 이에 그는 다시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좌천은 백거이에게 큰 타격을 주어 벼슬을 하고 있으나 본마음은 은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천하를 구제해야겠다는 젊은 날의 포부를 버리고 홀로 한 몸을 잘 보존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화 13년(818) 충주자사가 되었다가, 원화 15년(820)에 헌종이 갑자기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조정으로 돌아와 중서사인이 된다. 조정에서 당쟁이 일어나자 백거이는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외직을 맡겠다고 자청해 장경(長慶) 2년(822)부터 항주·소주자사 등을 지내며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문종(文宗) 대화(大和) 원년(827)에 비서감·형부시랑을 제수받았지만, 그는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며 머물 것을 자청한다. 대화 3년(829) 이후부터 백거이는 낙양에 거주하며 태자빈객·하남윤·태자소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낙양에서 백거이는 시·술·선(禪)·금(琴)·산수를 즐기면서 유우석(劉禹錫)과 창화(唱和)해 ‘유백(劉白)’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에 형부상서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회창 4년(844)에는 자비를 들여 용문(龍門)에 팔절석탄(八節石灘)을 정비해 물길을 편하게 해 주기도 했다. 회창 6년(846)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낙양 용문 향산(香山)의 비파봉(琵琶峯)에 묻혔으며, 이상은(李商隱)이 묘지명을 썼다.
옮긴이
정호준은 1994년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원진(元稹)과 그 악부시(樂府詩) 연구>로 1998년에 석사 학위를, <두보(杜甫)의 함적(陷賊)·위관(爲官) 시기(時期) 시(詩) 연구(硏究)>로 2005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두보 시를 중심으로 당시(唐詩) 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방문학자, 강남대학교 중국학센터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평택대학교, 호서대학교, 강남대학교 등에서 중국 문학과 중국어 관련 강의를 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반대학원 중어중문학과 BK21PLUS 한중언어문화소통사업단 연구 교수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초빙 연구원으로 있다.
<두보의 제화시 고>를 비롯해 20여 편의 논문이 있으며, 공저로 ≪중국시의 전통과 모색≫, ≪중국문학의 전통과 모색≫이 있고, 역서로 ≪신제악부/정악부≫, ≪그대를 만나, 이 생이 아름답다≫, 공역서로 ≪장자−그 절대적 자유를 향하여≫, ≪한비자≫가 있다.
차례
오래도록 그리워하다(長相思)
남몰래 하는 이별(潛別離)
보리 베는 것을 바라보며(觀刈麥)
과중한 세금(重賦)
벗으로 인한 상심(傷友)
신풍의 팔 자른 노인(新豐折臂翁)
숯 파는 노인(賣炭翁)
애초에 원진과 이별한 후에 갑자기 꿈에서 그를 만나고 깼을 때, 편지와 오동꽃 시가 함께 이르자 슬퍼 감회가 일었고 이로 인해 이 시를 짓다(初與元九別後忽夢見之及寤而書適至兼寄桐花詩悵然感懷因以此詩)
낙유원에 올라 바라보다(登樂遊園望)
원진이 새로 대나무를 심었다는 시를 대하고 감회가 일어 보내다(酬元九對新裁竹有懷見寄)
까마귀가 밤에 울다(慈烏夜啼)
가을날 언덕에 올라 노닐다(秋遊原上)
위촌의 비 내리는 속에 돌아오다(渭村雨歸)
금란자를 생각하며 지은 시 2수(念金鑾子二首) 중 첫째 수
도잠의 시를 본받아 지은 시 16수(效陶潛體詩十六首) 중 셋째 수
배 상공의 꿈을 꾸다(夢裴相公)
원진이 관직을 받은 후 통주의 일을 자세히 알려 주자 슬퍼져 감회가 일어 4수를 짓다(得微之到官後書備知通州事悵然有感因成四章)
연자루 3수(燕子樓三首)
남교역에서 원진의 시를 찾아보다(藍橋驛見元九詩)
배에서 원구의 시를 읽고(舟中讀元九詩)
이백과 두보의 시집을 읽고 책 뒤에 시를 짓다(讀李杜詩集因題卷後)
심양루를 읊다(題潯陽樓)
비파의 노래(琵琶行)
저녁에 바라보다(晩望)
밤에 내린 눈(夜雪)
대림사 복사꽃(大林寺桃花)
밤비(夜雨)
산속에서 홀로 읊다(山中獨吟)
악양루를 읊다(題岳陽樓)
상산로에서 느낀 바가 있어(商山路有感)
판교의 길에서(板橋路)
자미화(紫薇花)
오랫동안 한 시랑을 만나지 못해 재미 삼아 사운시를 지어 주다(久不見韓侍郞, 戲題四韻以寄之)
밤에 돌아오다(夜歸)
항주춘망(杭州春望)
행간의 꿈을 꾸고(夢行簡)
아침에 떠나 동정산으로 가며 배에서 짓다(早發赴洞庭舟中作)
취해서 유우석에게 주다(醉贈劉二十八使君)
<오야제> 곡에 맞춰 짓다(賦得烏夜啼)
천진교(天津橋)
죽은 아들을 곡하다(哭崔兒)
가을에 일어나는 생각(秋思)
옛 시집을 읽고(感舊詩卷)
미지 꿈을 꾸고(夢微之)
상서 유몽득을 곡하며 지은 2수(哭劉尙書夢得二首) 중 첫째 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보리 베는 것을 바라보며(觀刈麥)
농가는 한가한 날이 드물지만,
5월에는 사람들이 배나 바빠진다네.
밤사이에 남풍이 불어오니,
보리가 누렇게 밭두렁을 덮었다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대그릇에 담은 밥을 이고 가고,
아이들은 병에 담은 국을 들고,
줄지어 밭으로 음식을 가지고 가는데,
장정들은 남쪽 언덕에 있다네.
발은 여름날 흙의 열기로 찌는 듯하고,
등은 염천의 햇볕으로 타는 것 같은데도,
뜨거운 줄 모르고 힘써서 일을 하며,
다만 긴 여름 해를 아까워하네.
또 가난한 여인네가 있는데,
아기를 안고 그 옆에 있네.
오른손은 떨어진 이삭을 잡고 있고,
왼쪽 팔에는 낡은 광주리를 걸고 있네.
그들이 서로 돌아보며 하는 말을 들으니,
듣는 이가 슬프고 가슴 아프구나.
집과 밭은 세금으로 다 써 버리고,
이렇게 이삭을 주워 주린 배를 채운다고 하네.
지금 나는 무슨 공덕이 있어,
농사나 양잠을 하지 않는 것인가?
녹봉으로 300석을 받은 관리는,
연말에도 남아도는 식량이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니 스스로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잊을 수가 없구나.
田家少閑月, 五月人倍忙.
夜來南風起, 小麥覆隴黃.
婦姑荷簞食, 童稚攜壺槳.
相隨餉田去, 丁壯在南岡.
足蒸暑土氣, 背灼炎天光.
力盡不知熱, 但惜夏日長.
復有貧婦人, 抱子在其旁.
右手秉遺穗, 左臂懸敝筐.
聽其相顧言, 聞者爲悲傷.
家田輸稅盡, 拾此充飢腸.
今我何功德, 曾不事農桑.
吏祿三百石, 歲晏有餘糧.
念此私自愧, 盡日不能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