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원각촌(圓覺村)>은 1942년 2월 ≪국민문학≫에 발표된 작품이다. <적십자병원장>이 검열에 걸려 게재되지 못했고 중편 <벼>가 ≪만선일보≫에, 단편 <새벽>이 재만 조선인 작품집인 ≪싹트는 대지≫에 발표되었지만 만주에서 발표된 것이어서 본격적으로 국내 문단에 소개된 작품은 <원각촌>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재만 조선인 작품집 ≪싹트는 대지≫ 수록작인 <새벽>이 국내에 알려지고 나서 최재서의 원고 청탁을 받아 본격적으로 창작한 작품인 까닭에 안수길이 심혈을 기울인, 초창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만주국 이전 만주 조선 농민들의 모습을 최서해와는 다른 풍경으로 제시한 점, 억쇠라는 개성 강한 인물을 창조한 점, 그리고 작가 안수길의 만주 체험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한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
<목축기>, ≪북향보≫를 쓴 후 안수길은 1945년 6월 건강 악화로 귀향하여 흥남에서 요양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 1948년 월남,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으로 취임하며 남쪽에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쓴 작품이 이 책에 실린 <여수(旅愁)>다. <여수>는 바야흐로 해방 후 남한에서의 재출발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제삼인간형(第三人間型)>은 1953년 6월 ≪자유세계≫에 발표된 작품이다. 6·25 전쟁을 겪고 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을 통해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만주의 기억이 작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6·25 전쟁의 충격이 그만큼 큰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는데 이는 매우 커서 제3의 인간형을 만들 정도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세 인물이 변한 모습을 두고 작가는 제3인간형이라 말하고 있다.
<망명 시인(亡命詩人)>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해에 ≪창작과비평≫(1976년 9월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말년의 작품이라는 시기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에스토니아 망명 시인 바이로이다와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윤 시인의 문학적 삶의 궤적에 작가 안수길의 작가로서의 평생의 삶을 비추어보는 구조로 되어 있어 의미 깊다.
안수길은 조국을 떠나 만주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작가로서의 삶의 결론이란 바로 <망명 시인>의 결론이었다. 조국을 떠나서는 온전한 작가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바이로이다의 행적이 그 증거고 미국 이민 후 잠적한 윤 시인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수길은 이미 그들의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망명 시인>의 메시지는 작가가 자신의 삶에 내린 마지막 결론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200자평
안수길은 만주에 사는 조선인의 모습을 그리는 일에 전념했지만 만주국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덫에 걸려 역작 ≪북간도≫을 쓰기까지 많은 세월을 번민 속에 보내야 했다. 그러고는 작가로서의 삶은 조국을 떠나서는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삶의 궤도가 담겨 있는 주요 작품들을 통해 안수길의 작가로서의 평생을 비추어본다.
지은이
안수길은 1911년 11월 3일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6세 때 흥남시 서호리로 이주해 소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안용호가 어머니와 동생만을 데리고 만주 간도로 이주해 안수길은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낸다. 그는 14세인 1924년 아버지가 사는 만주로 이주해 1926년 만주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함흥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고보 2학년 때인 1927년 맹휴사건에 연루되어 자퇴하고 이듬해 3월 상경하여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계기로 만세사건이 터지자 이에 가담, 체포되어 구류 15일을 겪고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1930년 1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요 중학에 입학, 이듬해 이 학교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 고등 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학업을 계속 잇지 못하고 간도로 돌아간다. 그리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지만 학자금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건강만 해치자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1934년 석왕사에서 요양하며 문학의 꿈을 키운다.
안수길은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조선문단≫에 당선되어 등단한다. 이해에 소학교 동창인 김현숙과 결혼하고 박영준, 이주복, 김국진 등과 문예동인지 ≪북향≫을 간행한다. 1936년 ≪간도일보≫ 기자, 1937년 ≪만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1940년에는 중편 <벼>(≪만선일보≫), 단편 <사호실>(≪만선일보≫)을 발표하고 단편 <새벽>을 재만 조선인 작품집 ≪싹트는 대지≫에 수록한다. 1942년 단편 <원각촌>(≪국민문학≫)을 1943년에는 <목축기>(≪춘추≫)를 발표하고, 1944년 첫 장편소설 ≪북향보≫를 ≪만선일보≫에 5개월간 연재하여 완성하며, 창작집 ≪북원≫을 간행, 본격적인 작품 활동기에 접어들지만 1945년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를 사직하고 귀향 후 8·15 해방을 맞는다. 흥남에서 3년간 요양하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문화부 차장을 지내고 1949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 단편 <여수>, <범속>, <밀회>, <초련필담>, <가면>, <상매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전쟁 기간 중 피난지 부산에 있던 용산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며 1951년에 단편 <나루터의 탈주>를, 1952년에 단편 <명암>, <제비> 등을, 1953년에 <역의 처세철학>, <제삼인간형>을 발표하고 1954년에는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과장에 취임한다. 이해에 제2창작집 ≪제삼인간형≫을 간행, 이듬해 이 창작집으로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는 그의 대표작 ≪북간도≫를 ≪사상계≫에 연재, 3부를 완결한다. 1967년 ≪북간도≫ 4부와 5부를 전작으로 완성, 삼중당에서 간행한다. 이 작품은 1968년 국립극단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1969년 장편 ≪통로≫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했고, 1971년부터 장편 ≪성천강≫을 ≪신동아≫에 연재했다. 1977년 <망명 시인>을 쓰고 역사소설 ≪이화에 월백하고≫를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중 1977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작가 생활의 후반기에 서울시 문화상(1968년), 3·1문화상(1972년)을 받았다.
엮은이
서경석은 195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 1992년 이 대학 국문과에서 <한설야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한국 경향소설과 그 전통에 관해 연구하였고 1988년 ≪한국문학≫에 <분단문학의 기원>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근대 리얼리즘 문학사 연구≫,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으며 <해방 공간 소설의 현실인식과 그 전망>, <해방 공간의 민족주의와 민족문학론> 등의 논문이 있다. 대구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에서 1992년부터 근무하였고 2001년 9월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수길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때는 대학 시절 소설론 수업 시간이었는데, ≪북간도≫를 읽으며 감동적이긴 하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만주국의 이념에 관련된 것이었을 터인데, 현재 안수길 문학이 이산 문학이나 만주국 문학과 관련하여 논의가 많아짐을 생각하면 그 당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설야의 문학을 전공하며 배운 함경도 방언이 이 책의 각주를 붙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차례
원각촌(圓覺村)
여수(旅愁)
제삼인간형(第三人間型)
망명 시인(亡命詩人)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자리에 들어누어 그는 생각하였다.
‘조운의 말대로 조운은 사변의 압력으로 그의 사명을 포기했고 미이는 사변으로 성장했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석은 중얼거렸다.
“사명을 포기ㅎ지도 그것에 충실ㅎ지도 못하고 말라가는 나는? 나도 사변이 빚어낸 한 ‘타잎’이라고 할까.”
-<제삼인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