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독일 표현주의의 중심에 서다
엘제 라스커쉴러는 1910년경부터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일 표현주의 흐름의 범람 속에서, 문자 그대로 그 중심축에 자리 잡고 창작 작업에 몰두했던 여성 시인이다. 그녀는 당시 예술계 전반을 압도하던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여러 전위적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실질적으로 그들을 주도했다. 고트프리트 벤, 게오르크 트라클, 헤르바르트 발덴, 그리고 표현주의 대표 화가 프란츠 마르크, 바실리 칸딘스키 등 당대의 전위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친밀한 교류 속에 때로는 멘토로, 때로는 열정적인 연인으로 살았던 이 여인은 그야말로 당대 “가장 빼어난, 불가해한 서정적 위력”(카를 크라우스)으로서 군림했으며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여성 문인들, 예컨대 버지니아 울프, 마담 콜레트, 리카르다 후흐, 셀마 라겔뢰프 등과 나란히 “유럽을 주도하는 여성들”의 대열에 속하는 저명 여성 인사였다.
여성성과 종교, 죽음과 사랑을 노래하다
그녀의 작품은 사랑과 신앙, 자신의 꿈과 환상을 읊고 있는 듯 보이는 초기 시부터, 이후 보다 각성한 의식을 가지고 첨예한 사회 제반 문제들을 바라보게 되면서 인종 문제, 가부장적 인습이 지배하던 당시 양성의 문제 등 시대의 아픔과 요구, 삶의 고단함과 상실, 그리고 무엇보다 표현주의 작가들을 압도했던 허무와 죽음의 예감 등을 읊는 후기의 시 작품에 이르기까지, 마치 가곡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념과 상들을 독자적인 시어로 형상화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장성한 외아들의 긴 와병과 요양 기간, 그리고 사망 후의 침체 이후 맞은 창작의 절정기와 나치 치하를 피해서 독일을 떠나 스위스를 비롯한 몇몇 망명지에서 생활 중 궁핍과 배신과 극심한 고독감을 겪으며 나온 얼마간의 시 작품들은 개인의 운명을 비탄하는 차원을 넘어 동족인 유대인, 나아가 인류의 삶 전반을 포함하는 차원으로 고양되고 있으며, 달과 밤과 하늘을 노래하는 그녀의 서정시의 영역은 전 우주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독일 문학사에서 지워지다
이렇듯 “릴케의 사망 후 의심할 여지 없이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이라는 평과 함께, “우리 독일의 가장 위대한 거장들의 영속성을 지니는 창작 작품들에 버금가는” 시 작품들을 쓴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엘제 라스커쉴러가 독일 문학계에서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던 사실은 하나의 미스터리다. 그녀의 문학 작품이나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기까지 했던 회화 작품들이 나치 치하에서 모두 분서(焚書) 처분을 받았다고는 하나 10여 년간 그녀의 흔적이 그토록 철저히 잊히고 지워졌다는 사실은 그녀가 유대계 여성 작가였다는 이유 이외엔 다른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헤르만 헤세, 넬리 작스 등의 망명 작가들에게 노벨상이 속속 수여되었으나, 세기말과 세기 초 표현주의 대표 기수로 활약했던 엘제 라스커쉴러가 독일 문단에서 상당 기간 철저히 잊혔던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위적이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러 편견과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두 번이나 이혼한 경력을 지닌 이 탁월한 유대인 여성 시인이 평생 살아 내야 했던 “국외자”적인 위치와 “선택받은 자”의 찬란한 후광으로 인해 형성된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주위를 둘러쌌고, 오해와 망각 속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실체를 마침내 기억해 내어 경외감과 함께 공평한 평가를 시도하는 한편, 남아 있던 저술들과 원고를 발굴 정리해 전집을 낸 것은 1986년에 이르러서였다.
200자평
“독일 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그리고 가장 불가해한 서정적 위력”
“일찍이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여성 서정시인”
모두 엘제 라스커쉴러를 칭한 말이다. 독일 표현주의 대표 시인으로, 1932년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했지만 유대계라는 이유로 나치에게 추방당하고 작품이 금서로 지정된 이래 오랫동안 잊혔다. 그녀의 시들을 국내 처음으로 소개한다. 이정순 교수의 상세하고도 깊이 있는 해설이 작품 이해를 돕는다.
지은이
엘제 라스커쉴러(Else Lasker-Schüler, 1869∼1945)는 부퍼 강변의 공업 도시 엘버펠트에서 1869년 2월 11일 유대계 은행가의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4년 의사였던 베르톨트 라스커(Berhtold Lasker)와 혼인해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899년 외아들 파울이 태어났다. 1903년에 남편과 이혼하고 당시 표현주의의 기수이며 잡지 ≪폭풍(Der Sturm)≫의 발행인으로 9세 연하인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과 결혼했으나 1912년 다시 헤어졌다.
엘제 라스커쉴러는 베를린 이주 후 1899년부터 여러 문학 서클, 혹은 문학 공동체 등을 찾아 문단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며, 특히 첫 남편과의 이혼 이후 새롭게 얻은 자유를 누리며 더욱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예술 활동을 전개해 갔다. 충돌과 거부와 반항 등이 잇따랐지만 그녀의 본능적 창작 감각과 현대 예술 작품 내지 예술가들에 대한 정확하고 빼어난 판단력과 언급은 주위를 놀라게 했고 특히 그녀 자신의 시 작품들과 산문 작품들은 곧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예술가적 사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탁월한 시적 재능을 발견한 기성 문인들, 비평가들의 추천 등을 통해 그녀는 몇몇 카바레에서 시 작품을 낭송할 수 있었고, 여러 문예 잡지와 일간 신문 등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일단 작품들을 출간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명성은 그야말로 비상(飛翔)했다. 마침내 1902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 ≪저승의 강(Styx)≫을 발간했으며, 이로써 그녀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잇따라 서정시들을 발표했으며 그 밖에 <부퍼강(Die Wupper)>(1909)을 비롯한 여러 희곡 작품들도 집필했는데 자신의 부친의 전기적 사실들을 형상화한 <아르투르 아로니무스(Arthur Aronymus)>(1932)는 대단히 성공리에 공연되었으며, 1932년에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33년, 시인으로서 생애의 절정기에 있었던 엘제 라스커쉴러는 나치 당국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했고, 그녀의 작품들은 “퇴폐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금서로 지정되어 소각되었다. 이후 스위스를 비롯한 여러 망명지를 전전하며 생활고와 고독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1945년 1월 22일 거의 76세가 다 된 나이로 심한 협심증을 일으켜 사망한다. 사망 바로 이튿날 예루살렘의 올리브원에 매장되었다.
옮긴이
이정순은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DAAD 연구교수, 방문교수를 지냈다. 동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동 대학에서 정년 퇴임했다.
차례
스틱스 Styx
어머님 Mutter
세상에서 도주하기 Weltflucht
질투 Eifersucht
가뭇한 살갗의 보바네이 Die schwarze Bhowanéh
충동 Trieb
꿈의 급소 Nervus Erotis
겨울밤 Winternacht
태초의 봄 Urfrühling
무아경(無我境) Sinnenrausch
비바! Viva!
혼돈 Chaos
봄샘 Lenzleid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
나의 드라마 Mein Drama
매우 강하게 Fortissimo
내 아들아 Mein Kind
내 아가야 Meinlingchen
무상한 존재 Morituri
비가 Elegie
방랑자 Vagabunden
두 사람 Die Beiden
내 혈통의 공포 Meine Blutangst
제7요일 Der Siebente Tag
인식 Erkenntnis
사랑의 비상(飛翔) Liebesflug
사랑 Die Liebe
꿈 Traum
이브 Eva
충족 Erfüllung
비밀 Das Geheimnis
잔향(殘響) Nachklänge
이브의 노래 Evas Lied
5월 비 Maienregen
내 말 없는 노래 Mein stilles Lied
논객 Streiter
내 사랑의 노래 Mein Liebeslied
나의 기적 Meine Wunder
나의 넋 졸고 있네 − Nun schlummert meine Seele −
나를 위한 조가(弔歌) Mein Sterbelied
나를 보시나요 Siehst du mich
나직이 말하길 Leise sagen
옛 티베트 양탄자 Ein alter Tibetteppich
슬퍼라… Ich bin traurig…
오오, 내 쓰라린 욕망이여… O, Meine schmerzliche Lust…
마지막 별 Der letzte Stern
고향 집 Heim
스핑크스 Sphinx
세상의 종말 Weltende
저녁답 Abend
사랑의 노래 Ein Lied der Liebe
나의 사랑 노래 Mein Liebeslied
고향 그리움 Heimweh
어머님 Meine Mutter
휴식 Rast
조가(弔歌) 한 곡 Ein Trauerlied
마지막 남은 사람 Der Letzte
히브리 발라드 Hebräische Balladen
나의 민족 Mein Volk
다윗과 요나단 David und Jonathan
파라오와 요셉 Pharao und Joseph
보아스 Boas
룻 Ruth
줄라미트 Sulamith
용서 Versöhnung
다윗과 요나단 David und Jonathan
나의 파란 피아노 Mein blaues Klavier
나의 벗들에게 An Meine Freunde
나의 아들에게 An mein Kind
나의 파란 피아노 Mein blaues Klavier
전주곡 Ouvertüre
날은 저물어 오고… Es kommt der Abend…
저녁 시간 Abendzeit
나 기진맥진 길섶에 누워 있다 Ich liege am Wegrand Übermattet
추방당한 여인 Die Verscheuchte
그의 자그마한 세상 반백이 되어 돌아오다 Ergraut kommt seine kleine Welt zurück
헌사(獻辭) Hingabe
나 아느니 Ich weiss
가을 Herbst
황혼이 다가오면… Die Dämmerung naht…
나의 가슴 지쳐 휴식을 취하다 Mein Herz ruht müde
그이에게 AN IHN
그러곤 Und
아름다운 사람에게 Dem Holden
미완성 Die Unvollendete
나에게 An Mich
시 Gedichte
시들어 버린 미르테 Verwelkte Myrten
사랑 Liebe
체념 Resignation
청춘 Jugend
구혼(求婚) Brautbewerbung
그리움 Sehnsucht
환상(幻想) Phantasie
악령 여사(惡靈女史) Frau Dämon
제왕(帝王)의 유언 Ein Königswille
슬픔의 노래 Das Lied vom Leid
보름달 Vollmond
나 묻지 않으리 Ich frage nicht mehr
나 은밀히 당신의 꿈을 꾼다 − Ich träume so leise von Dir −
사랑 Die Liebe
우리의 사랑 노래 Unser Liebeslied
야만인(野蠻人)에게 Dem Barbaren
오, 너의 손 O. deine Hände
호랑이 귀공자에게 Giselheer dem Tiger
이단자(異端者) 귀공자에게 Giselheer dem Heiden
귀공자 제왕께 Giselheer dem König
소년 귀공자에게 Giselheer dem Knaben
나무 뒤로 나 몸을 숨긴다 Hinter Bäumen berg‘ ich mich
오롯이 금강석만으로… Lauter Diamant…
어머님께 Meiner Mutter
제나 호이 군 Senna Hoy
사샤 Sascha
게오르크 트라클 Georg Trakl
이별 Abschied
프란츠 마르크에게 부쳐 An Franz Marc
황금 기사님께 An den Ritter aus Gold
기도 Gebet
오 나 세상 떠나보내 다오! O Ich möchte aus der Welt!
노래 한 곡 Ein Lied
스틱스, 저승의 강 Styx
푸른 기사님이 쓰러졌을 때… Als der blaue Reiter war gefallen…
트리스탄을 알게 됐을 때 − Als ich Tristan kennen lernte −
작별 Abschied
신(神)이시여 들어 주세요… Gott Hör…
베를린 시민 제위 An die Einwohnerschaft Berlins
이별 Abschied
기념일 Gedenktag
제야(除夜)에 Letzter Abend im Jahr
신께 바치는 노래 Ein Lied an Gott
창세기 Genesis
슬픈 유희(遊戱)의 노래 Das Lied des schmerzlichen Spiels
나의 고별사(告別辭) Mein Abschiedsbrief
유고(遺稿)집에서 Gedichte aus dem Nachlass
<그대의 가녀린 자태는 거무스름한 세공품처럼 흐른다> Deine Schlankheit fliesst wie dunkles Geschmeide
<나 작센호페에 산다네> Ich wohne im Sachsenhofe
<나랑 영화 구경 가세요> Komm mit mir in das Cinema
나의 조가(弔歌) Mein Sterbelied
해설
지은이 연보
참고 문헌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옛 티베트 양탄자(Ein alter Tibetteppich)
나의 넋을 사랑하는 당신의 넋
티베트 양탄자 속에 함께 짜여 들었네.
한 올 한 올 사랑에 홀린 찬란한 색깔들
온 하늘나라를 누비며 서로 구애하던 별들.
우리 둘의 다리는 진귀한 보물 위에 얹혀
수천수만 수억의 그물코 폭만큼 뻗어 있네.
감미로운 라마 왕자님, 사향초(麝香草) 왕좌 위에서
얼마나 오래오래 당신의 입술은 나의 입술에 포개져 있는가요,
뺨에 뺨을 서로 비비던 오색 영롱히 얽혀 자아진 시간은?
나 아느니(Ich weiss)
나 아느니, 머잖아 나 죽음을 맞아야 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모든 나무들은 일제히 빛을 비춰 주네
오래도 갈망했던 7월의 키스를 향해 −
몽롱하게 되어 가네 나의 꿈들 −
이보다 더 희미하게 마감해 본 적은 없었네
나의 시운(詩韻)을 읊었던 시집들 속에서.
그대 한 떨기 꽃을 나에게 인사로 꺾어 주네 −
나 그러나 그것을 맹아(萌芽) 속에서 이미 사랑했었네.
나 아느니, 머잖아 죽음을 맞아야 하리라는 것을.
나의 숨결 신의 강물 위로 나부끼고 −
나 발걸음을 사뿐히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오솔길 위에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