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회시> 82수는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완적의 작품이며, 중국의 고전 시가 중에서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선진 시대에 ≪시경≫이 탄생해 중국의 정통 시가 문학을 출발시켰다고 한다면, <영회시> 82수는 이보다 약 8세기가 지난 위진 교체기에 5언 신시체로 나와 최고의 서정시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한대 악부시와 <고시 십구수> 그리고 조식(曹植)을 비롯한 건안 시가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영회시>는 일정한 시기에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평소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지은 작품이다.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고통스러운 삶과 고독한 정회를 묘사했다.
둘째, 권력 찬탈과 변절자에 대해 풍자했다.
셋째, 노년기 인생 역정과 불안한 여생을 서술했다.
넷째, 은둔 생활과 신선 세계를 추구했다.
<영회시> 82수의 최대 특징은 비흥(比興), 상징, 용전(用典) 등의 수법이 자주 사용되어 시인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시의 난해성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 자체의 시작 수법에서 기인했다.
둘째, 복잡 미묘한 시인의 심리적 갈등이 상식을 뛰어넘었다.
셋째, 창작 배경이나 정황이 기타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판본에 따라 다른 글자가 많아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종영(鍾嶸)이나 이선(李善) 등 역대 수많은 비평가들이 <영회시> 82수를 지극히 난해한 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런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청일현원(淸逸玄遠)의 미를 구사했다는 점과 그의 철리(哲理)와 정사(情思) 그리고 의상(意想)이 적절하고 풍부하게 두루 포함됐다는 점은 또 다른 예술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회시> 82수는 일찍부터 비평가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종영의 ≪시품≫에는 상품(上品)에 올라 있고, 소명태자의 ≪문선≫에는 17수가 선록되었으며, 명 왕세정(王世貞)과 청 왕부지(王夫之), 방동수(方東樹) 등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쳐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좌사(左思)의 <영사(詠史)> 8수,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22수, 유신(庾信)의 <의영회(擬詠懷)> 27수, 진자앙(陳子昻)의 <감우(感遇)> 38수,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82수 등의 연작시가 이에 해당한다.
200자평
죽림칠현의 대표적 인물인 완적의 시를 종합했다. ‘영회’는 ‘마음에 품은 바를 노래한다’는 의미다. 위나라의 이름 있는 문인으로서 나라가 기울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을 시에 담은 것이 <영회시>다. 정권을 찬탈한 자들과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권력 싸움이 치열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 차라리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 등을 노래한 완적의 시 82수가 모두 담겨 있다.
지은이
완적은 위진 교체기의 최고 시인이며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가 사종(嗣宗)이고, 건안 15년(210) 진류군 위씨현(陳留郡 尉氏縣,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건안 문학을 대표하는 건안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완우(阮瑀)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후한과 촉 그리고 오나라가 정립된 삼국 시대였는데, 후한은 사실상 조조의 수중에 있었다. 220년에 후한이 멸망하고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를 세웠다. 완적이 두 살 때인 서기 222년에 부친인 완우가 죽자, 당시 완씨는 명문대족(名門大族)이긴 했으나 청렴결백한 아버지를 둔 관계로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고, 홀어머니를 위해서 어릴 적부터 효도를 몸에 익혔다. 그는 여덟 살 때 이미 좋은 글을 썼고, 이후 독서에 매진해 수개월 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했으며, 열네댓 살 때에는 ≪시경≫과 ≪서경≫ 등의 유가 경전에 탐닉해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 같은 유자(儒者)가 되기를 꿈꿨다. 그리하여 제세(濟世) 의지도 확고하게 갖췄다. 그는 완우의 아들이라는 점과 종형인 문업(文業)이 그를 인재로 보았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벼슬과는 항상 거리를 두었다. 서른두 살(242) 때 태위(太尉) 장제(蔣濟)의 추천을 받았으나 오히려 언짢게 여기고 거절하다가 화를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주위의 권유로 잠시 직무를 보다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서른여덟 살(248) 때는 상서랑을 지내다 당시 최고의 실세인 조상(曹爽)의 참군(參軍)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한 해가 지나 고평릉 사건으로 조상이 죽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견지명이 있다고 얘기했다. 249년 고평릉 사건을 계기로 조씨 권력이 사마씨로 넘어간 후, 이를 다시 되찾으려는 조씨와의 싸움이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에 명사들은 현학과 청담이 성행하고 피세 사상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자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술과 거문고 그리고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후 위나라 태부(太傅)가 된 사마의(司馬懿)는 완적을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발탁했고,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가평 3년(251)에는 관배대장군(官拜大將軍)인 사마사(司馬師: 사마의의 장남)가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정원 원년(254)에는 사마사가 주군(主君)인 조방(曹芳)을 폐위해 제왕(齊王)으로 앉히고 조모(曹髦)를 옹립한 후 그를 관내후(關內侯)로 봉했다가 다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다음 해인 정원 2년(255) 정월에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다음 달인 2월에는 사마사가 병사해 그의 동생인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사마소는 완적을 동평상(東平相)에 임명했으나, 그는 열흘도 채 못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그래서 사마소는 그를 다시 대장군종사중랑으로 임명해 왕침(王沈) 등과 더불어 위서(魏書)를 편찬케 했다. 그 후 완적은 보병 병영에 술 잘 빚는 주방장과 좋은 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청해 보병교위(步兵校尉)가 되었다. 이때부터 완적은 본격적으로 반예교적 방탕 행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완적 자신은 의도적인 반예교적, 반인륜적 방탕 행위를 자행했지만, 아들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함(阮咸: 완적의 조카) 하나만으로도 족하니,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옮긴이
심우영(沈禹英)은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대만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 중문과에 교환학생으로 입학해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중문학회 회장, 한국중어중문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캐나다 UBC에서 방문학자로 1년간 체류했다. 또한 교내에서는 부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고, 특히 한중문화정보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해 중국 지역학 연구에 매진했다.
저역서로는 ≪중국 시가 여행≫, ≪중국 시가 감상≫, ≪태산, 시의 숲을 거닐다≫, ≪형산, 시의 산을 오르다≫, ≪아미산, 시의 여행을 떠나다≫ 등 다수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소주 원림의 경명(景名) 연구>, <위진 원림시와 생활미학> 등 수십 편이 있다.
현재 중국의 산수 문학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중국의 명산(名山)과 관련된 산수시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차례
제1수 夜中不能寐
제2수 二妃遊江濱
제3수 嘉樹下成蹊
제4수 天馬出西北
제5수 平生少年時
제6수 昔聞東陵瓜
제7수 炎暑惟玆夏
제8수 灼灼西頹日
제9수 步出上東門
제10수 北里多奇舞
제11수 湛湛長江水
제12수 昔日繁華子
제13수 登高臨四野
제14수 開秋肇涼氣
제15수 昔年十四五
제16수 徘徊蓬池上
제17수 獨坐空堂上
제18수 懸車在西南
제19수 西方有佳人
제20수 楊朱泣岐路
제21수 於心懷寸陰
제22수 夏后乘靈輿
제23수 東南有射山
제24수 殷憂令志結
제25수 拔劍臨白刃
제26수 朝登洪坡顚
제27수 周鄭天下交
제28수 若木耀西海
제29수 昔余遊大梁
제30수 驅車出門去
제31수 駕言發魏都
제32수 朝陽不再盛
제33수 一日復一夕
제34수 一日復一朝
제35수 世務何繽紛
제36수 誰言萬事艱
제37수 嘉時在今辰
제38수 炎光延萬里
제39수 壯士何忼慨
제40수 混元生兩儀
제41수 天網彌四野
제42수 王業須良輔
제43수 鴻鵠相隨飛
제44수 儔物終始殊
제45수 幽蘭不可佩
제46수 鷽鳩飛桑楡
제47수 生命辰安在
제48수 鳴鳩嬉庭樹
제49수 步遊三衢旁
제50수 淸露爲凝霜
제51수 丹心失恩澤
제52수 十日出暘谷
제53수 自然有成理
제54수 夸談快憤懣
제55수 人言願延年
제56수 貴賤在天命
제57수 驚風振四野
제58수 危冠切浮雲
제59수 河上有丈人
제60수 儒者通六藝
제61수 少年學擊刺
제62수 平晝整衣冠
제63수 多慮令志散
제64수 朝出上東門
제65수 王子十五年
제66수 寒門不可出
제67수 洪生資制度
제68수 北臨乾昧溪
제69수 人知結交易
제70수 有悲則有情
제71수 木槿榮丘墓
제72수 修塗馳軒車
제73수 横術有奇士
제74수 猗歟上世士
제75수 梁東有芳草
제76수 秋駕安可學
제77수 咄嗟行至老
제78수 昔有神僊士
제79수 林中有奇鳥
제80수 出門望佳人
제81수 昔有神仙者
제82수 墓前熒熒者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한밤중 잠 못 이루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 타니,
엷은 휘장에 밝은 달 비치고
맑은 바람 옷깃 스친다.
바깥 들녘 외기러기 울부짖는 소리
북쪽 숲 뭇 새들 우는 소리.
배회한들 무엇을 볼 수 있으리?
깊은 근심에 마음만 상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