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83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결투 때문에 캅카스로 좌천되어 간 귀족 장교 페초린의 모험과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당대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캅카스는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 때 오스만튀르크·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인 끝에 러시아로 귀속된 땅이다. 이곳에는 체르케스인, 체첸인, 오세트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인구시인, 카바르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 민족은 러시아에 복속된 이후 굴하지 않고 러시아의 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작가 레르몬토프는 장교로 캅카스에서 복무했는데 당시는 이 지역의 저항 운동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전쟁에 휘말려 있던 캅카스 지역이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이 지역은 당대 낭만주의 사조와 맞물리면서, 영국인 바이런에게 그리스가 태고의 이상과 미를 간직한 땅으로 비쳤던 것처럼, 러시아인에게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낭만주의적인 ‘이국’으로 여겨졌다. 또 캅카스는 결투에 연루되었든지 정권에 거슬렸던 군인 출신 러시아 귀족들의 유배지·강등지로도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캅카스는 빼어난 자연 환경과 온천지 등으로 인해 안전한 지역은 러시아 귀족들의 휴양지이자 요양지로 각광을 받았다.
≪우리 시대의 영웅≫는 캅카스가 지니고 있는 이런 낭만주의적 코드과 사회적 배경을 잘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작품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캅카스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에 깊은 서정성을 부여하며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 ‘선과 악’, ‘운명과 인간’이라는 주요 테마와 모티브들을 엮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캅카스 주둔 러시아군을 흔히 ‘캅카스인’이라고 불렀다. ≪우리 시대의 영웅≫에 나오는 이등대위 막심 막시미치는 캅카스인의 전형이다. 이들은 푸시킨의 ≪캅카스의 포로≫와 같은 낭만주의적인 서사시에 매료되어 자원해 온 군인들이다. 처음에 이들은 영웅적인 전공을 세우길 꿈꾸지만, 막상 전선에 나가서는 전투도 드물고 적을 만나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실망한 채 캅카스의 무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5∼6년의 천편일률적인 세월을 겪어 낸다고 한다. 그사이 이들은 가슴에 주렁주렁 훈장을 달게 된다. 하지만 승진도 잘 안되고 성격은 점점 음울해지고 과묵해지면서 더 이상 진군도 자청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들은 본격적인 캅카스 사람이 되어 가기 시작한다. 현지 민족들과 친구가 되면서 캅카스 복무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마흔 정도가 되면 고향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결국 이들은 일부러 부상을 당해 퇴역한 뒤 귀향하거나, 전쟁에서 죽거나, 운이 좋아 결혼을 해서 아내의 보살핌 가운데 요새에서 죽는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이지만 캅카스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러시아적 요소와 귀족적 면모를 잃은, 레르몬토프의 말에 따르자면, ‘반은 러시아인이고, 반은 아시아인이 된’ 독특한 계층의 일원이다.
레르몬토프는 이렇듯 당대의 캅카스 사정을 생생히 그려 냈다는 점에서 칭송을 받는다.
200자평
27세 때 결투로 요절한 천재 작가 레르몬토프의 유일한 완성 소설. 이미 국내에서 번역본이 몇 종 출간됐지만 19세기 제정 러시아와 캅카스 지역의 배경을 이해하기엔 부족했던 면이 있다. 레르몬토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자가 풍부한 각주 및 설명으로 당대의 배경 지식을 설명해 준다.
지은이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1814년 10월 3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야 미하일로브나 아르세니예바는 부유하고 명망 높은 가문의 후손이었고, 아버지 유리 레르몬토프는 퇴역 대위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 레르몬토프의 외할머니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아르세니예바는 외손자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사위는 무척 싫어했고 이로 인해 가정불화가 있었다. 레르몬토프는 외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응석받이로 자라 고집이 세고 신경질적이었다. 한편으론 몸이 약해 세 번에 걸쳐 캅카스로 요양을 갔다. 유년 시절에 가 본 캅카스는 그의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색적·문학적인 소년이 되어 갔던 것이다. 1828년, 레르몬토프는 모스크바 부속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 이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 쓴 작품들은 주로 푸시킨을 모방한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서사시 ≪악마≫의 창작에 착수했다. 그는 이 작품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된다. 1830년 레르몬토프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모스크바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지적·정신적·정치적 호기심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레르몬토프는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적극 동조했다. 강의 도중 문제 있는 교수를 쫓아내거나 비판하는 행동에 나섰고, 종국에는 사실상 쫓겨나고 만다. 이어 그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편입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근위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 시절은 고됐지만 그 와중에 생애 최초의 소설인 ≪바딤≫(미완성)을 썼다. 임관 후 사교계에 드나들기 시작하는데 사교계 상층부는 그를 두고 ‘불손하게도 근본을 알 수 없는 자가 사교계에 머리를 들이밀려고 한다’고 여겼다. 그는 사교계에서 관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한 여인을 이용해 버리고는 외면하는 행각을 벌였다. 이런 일은 나중에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그 후 반골 기질이 발휘되며 황실 및 권력층과 관련된 필화, 유배, 일부 인사들과의 원한 등이 반복됐다. 마침내 1841년, 사관학교 동기 마르티노프와의 반목이 폭발한다. 레르몬토프는 일찍이 마르티노프의 집안과 오해에 휩싸인 적이 있고, 거기에 레르몬토프는 마르티노프를 놀리고 다녔다. 일부 권력층이 마르티노프를 ‘충동질’했고 결국 둘 사이에는 결투가 벌어진다. 그해 7월 15일 결투가 성사됐고, 레르몬토프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마르티노프는 겨우 석 달 동안 투옥됐다가 풀려났다.
옮긴이
홍대화는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논문 <레르몬토프의 소설들에 나타난 구성의 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도스토옙스키였지만, 대학교 3학년 때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을 읽고, 주인공 페초린에게서 도스토옙스키 소설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의 모습을 발견하고 레르몬토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찾아간 레르몬토프 박물관의 낭만주의적 정취에 매료되어 레르몬토프를 전공할 결심을 하고, 1991년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때마침 1992년부터 레르몬토프에 대한 특강이 진행될 계획임을 보고, 레르몬토프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1995년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후, 2003년부터 ‘악마성’이라는 테마 속에서 푸시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나타난 악마적인 주인공 형상들의 상호 관련성, 고대 루시 문학과 고골, 불가코프의 작품에 드러난 ‘악마성’을 추적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역서 ≪죄와 벌≫(열린책들, 2000), ≪거장과 마르가리따≫(열린책들, 2007), ≪바흐찐과 기독교: 믿음의 감정≫(부산대 출판부, 2009)과 입문서 ≪도스또예프스끼≫(살림출판사, 2005) 등이 있다.
차례
저자 서문
제1부
I. 벨라
II. 막심 막시미치
페초린의 수기
서문
I. 타만
제2부
II. 공작영양 메리
III. 운명론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의사 선생. 이 분들이 아마 서두르느라 내 권총에 실탄 넣는 것을 잊은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장전을 해 주십시오. 아주 잘!”
“그럴 리 없어요!” 대위가 외쳤다. “그럴 리 없어! 난 권총 두 자루 모두 장전했소. 당신 총에서 총알이 빠져나간 건 아니오?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 당신은 장전을 다시 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건 규칙에 완전히 어긋나는 겁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대위에게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똑같은 조건으로 당신과 결투를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우물거렸다.
그루시니츠키는 당황하고 음울한 모습으로 머리를 가슴에 박았다.
“그들을 내버려 둬!” 그는 마침내 의사의 손에서 내 권총을 빼앗으려고 하는 대위에게 말했다. “저들 말이 옳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대위는 공연히 그에게 여러 신호를 보냈다. 그루시니츠키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의사는 총에 장전을 해서 내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보고 대위는 침을 뱉고 발을 굴렀다. “너는 바보야, 친구.” 그는 말했다. “저속한 바보야! 나한테 맡겼으면, 다 내 말대로 해야지… 자업자득이야! 파리처럼 자기를 잡아라….”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면서 투덜댔다. “어쨌든 이건 규칙에서 어긋나는 일이야.”
“그루시니츠키.” 나는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네. 자네의 험담을 거두게. 그럼, 모든 것을 용서하겠네. 자네는 나를 바보로 만드는 데 실패했어. 내 자존심은 충족되었어. 우리가 언젠가는 친구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불타올랐다.
“쏘게.” 그는 대답했다. “나는 나를 경멸하고, 자네를 증오하네. 만일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밤에 자네를 베어 버릴 거야. 이 땅에 자네와 내가 함께 숨 쉴 곳은 없어.”
나는 총을 쏘았다.
연기가 흩어지자, 그루시니츠키는 공터에 없었다. 다만 먼지만이 가벼운 기둥이 되어 절벽의 끝에서 일고 있었다.
“코미디는 끝났소!”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