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한국 근현대소설 초판본’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를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원형(圓形)의 전설(傳說)≫은 액자식 구성과 알레고리 형식을 통한 한국전쟁 이데올로기 비판과 더불어 문명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서술자는 인류가 동서 양 진영의 대결과 그에 따른 핵전쟁으로 멸망하고 난 이후 시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근대 세계의 실상과 그 전말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 의미를 평가하는 제3의 관찰자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장이다. 주인공 이장은 오택부와 오기미의 사생아로 등장한다. 이장의 부모인 오택부와 오기미는 남매간이다. 이들 남매의 근친상간으로 이장이 탄생한다.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두 남매는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설정된다. 작가는 두 이념의 갈등을 근친상간으로 알레고리화한 것이다. 오택부와 오기미의 근친상간은 같은 민족끼리의 민족상잔으로 형상화된다. 근대 이성의 뿌리인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근친상간을 통하여 사생아로 등장한 것이 한국전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한국전쟁의 연원에 대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혹은 자유와 평등의 근대적 세계관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는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이 르네상스가 추구하는 헬레니즘 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평등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로, 자유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한반도의 삼팔선을 경계로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근친상간이라고 설명된다. 한국전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근친상간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장용학은 한국전쟁과 전후의 극한적인 궁핍, 폐허, 왜곡, 타락 속에서 실존적 현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적으로 날카롭게 환기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현실과의 극심한 불화 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계의 폭력성과 맞서는 이들 주인공의 모습은 알레고리나 환상적 수법을 통해 극화될수록 더욱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한편, 실존의 조건과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성격을 지닌다.
200자평
≪원형(圓形)의 전설(傳說)≫은 액자식 구성과 알레고리를 통해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와 문명 비판을 시도한다. 주인공 이장은 아버지 오택부와 어머니 오기미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사생아다. 그의 출생 자체가 민족상잔, 한국전쟁을 가리킨다. 장용학은 한국전쟁과 전후의 극한적인 궁핍, 폐허, 왜곡, 타락 속에서 실존적 현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적으로 날카롭게 환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은이
장용학은 192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출생했다. 1940년에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에 입학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후 청진의 지방 문단에서 김진수, 강소천 등과 어울려 학교 연극의 각본 연출을 맡기도 한다. 1947년 월남했다.
1949년 단편 <희화(戱畵)>를 발표한 데 이어 1950년 <지동설(地動說)>, 1952년 <미련 소묘(未練素描)>가 ≪문예≫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단편 <요한 시집>과 중편 <비인 탄생(非人 誕生)>을 발표한 후다. 주요 작품으로 중편 <역성 서설(易姓 序說)>, 희곡 <일부변경선 근처(日附變更線 近處)>, 장편 ≪원형의 전설≫, 단편 <현대의 야(野)>, <유피(遺皮)>, ≪청동기≫, <잔인의 계절>, <상흔(傷痕)>, 중편 <효자점경(孝子點景)>, <오늘의 풍물고(風物考)> 등이 있다.
장용학은 1987년 단편 <하여가행>을 끝으로 절필 상태에 들어갔으며, 서울 갈현동 자택에서 은자와도 같이 생활했다. 199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유작으로 <가제 빙하 기행>(≪문학사상≫, 1999. 10, 장용학 특집호), <천도시야비야>(≪한국문학≫, 2001. 가을호) 등이 있다.
엮은이
홍용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중앙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젊은 평론가상, 애지문학상,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연구서 ≪김지하문학연구≫,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등이 있다.
차례
第一章
第二章
第三章
第四章
第五章
第六章
第七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동양에 있은 나라였고 ‘자유’와 ‘평등’은 서양에서 생긴 물결이었읍니다. 이 自由와 平等이 核戰爭을 일으켜 결국 人類 前史에 終焉을 고하게 하는데, 六·二五動亂이라고 하는 그 前哨戰과 같은 전쟁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조선이라는 땅이었읍니다. 그런데 족보를 따지면 르네상스를 어머니로 하는 프랑스革命이 낳은 男妹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이 어찌하여 생면부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이라는 엉뚱한 나라에 가서 충돌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世界史라고 할 수 있는 西洋史의 흐름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겠읍니다.
−3쪽
‘民族이냐, 階級이냐?’ ‘自由냐, 平等이냐?’ 하고 다투는 것은 마치 ‘圓形이 더 크다. 아니다, 四角形이 더 크다’ 하고 싸우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읍니까. 이 이야기를 ‘圓形의 傳說’이라고 이름 한 것은 쑥스러운 時節에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이고 무슨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인간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쑥스럽게만 산 것이 아니었읍니다. 마치 地球가 겉으로 보기에는 딱딱한 죽은 껍질이지만 그 地殼 속에는 불덩어리가 이글거리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밖에서 보기에는 쑥스러운 껍질로 싸여 있었지만 그 속에는 불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지구의 어떤 부분에서 가끔 불덩어리가 지각을 뚫고 噴出하듯이 어떤 인간에 있어서는 그 속에 꼭 싸여 있던 불이 그 쑥스러움을 뚫고 튀어나오는 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正史에는 기록되지 못하고 野史의 한구석에 겨우 끼일 수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私生兒의 이야기도 그러한 野史의 한 토막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10∼11쪽
“모두 二分法이란 것 때문이오. 세상에는 分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이 二分法이란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따라서 가장 人間的인 分法인데, 그래서 가장 주먹九九로 돼 있는 거요. 二分이란 바꾸어 말하면 對立인데 소위 科學的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 對立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오. 한 줄로 ‘나라비’를 시켜 놓으면 서로 이웃이 되어서 모두 親戚이란 말이오. 靑은 남색과 藍은 紫朱와, 자주는 赤色과, 적색은 朱黃과, 주황은 綠色과, 녹색은 靑色과, 이렇게 한 바퀴 휘 돌게 되거든. 道德도 마찬가지. 봐요. 善은 忠과, 충은 愛國과, 애국은 暗殺과, 암살은 惡과. 그리고 이번엔 거꾸로 말이오. 惡은 도둑질과, 도둑질은 굶주림과 奉養과 봉양은 孝와, 孝는 善이거든….”
−269∼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