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윤동주(尹東柱)는 청소년 시절인, 용정(龍井) 광명중학(光明中學) 재학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少年)≫에 동주(童舟)라는 이름으로 동시 몇 편을 발표한 이래 조선일보 학생란 및 연희전문학교 문과 발행의 ≪문우(文友)≫에 작품 몇 편이 실렸을 뿐, 대부분의 시는 해방 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가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한국 문학사에 소개되었다. 그는 직접적인 문단 활동의 체험이 없다는 이유로 문학사 서술에서 제외되다가 김윤식·김현의 ≪한국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사 범주에 편입되었다. 그의 시가 위치한 1940년대의 문학사적 공간은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성전으로 선포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구하던, 일제강점기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암흑기 속에서 창작된 윤동주의 시는 단순히 민족적 자긍심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고백의 시학을 독창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윤동주의 시에서 고백은 그의 시 담론의 토대를 형성하는 내적 구조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은 윤동주의 고백적 시 담론을 성경 해석학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그의 시가 나타내는 기독교 문학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시에서 고백은 여타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기독교 성경에서 비롯된 언어로부터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윤동주 시의 고백은 기독교 성경과의 알레고리에 의해 형성된 희생 제물의 제의적 상징들과 참회자가 토설하는 속죄 고백의 언어적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고백은 복합적인 정체성으로부터 말미암고 있다. 윤동주는 시대적으로 식민지 청년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서 살아온 실향민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은 그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를 이룬 고백의 시학을 구축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의 초기 작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흠 없이 성별된 희생 제물과 메시아로서 인정하는 고백이 나타난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흠의 고백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의 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성결 의식은 흠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고 있다. 흠의 상징성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윤동주 시에 있어서 희생 제물의 표상은 메시아로서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묶은 자선 시고에서는 일제의 속박으로 고통당하는 민족의 구원을 염원하는 기도의 고백이 나타난다. 그의 시에서 죄의 상징은 병든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동주는 일제의 압제 아래 있던 우리 민족을 병의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환자의 은유로 표현한 것이다. 민족의 회복을 향한 열망은 시인 자신을 민족 구원을 위한 제물로 바치겠다고 기도하는 비장한 고백으로까지 나아간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통해 상징적인 희생 제물로서 민족을 위한 속죄를 감당하려고 한 것이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위해서 굴욕적인 창씨개명을 하고 지배자의 나라에서 썼던 시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고 그 부끄러움을 토설하는 고백이 나타나고 있다. 허물의 인식을 통해 시인은 실존적 자아의 가치가 하락하는 내면적 고통을 체험한다. 그렇지만 허물을 인식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시인은 심미적·윤리적인 자기 정체성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또한 허물 의식을 통해 윤동주는 그의 시를 특징짓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확립하게 된다. 부끄러움의 미학은 일제 치하 말기에 고백의 시어를 통해 윤동주가 이루어 낸 한국 시사의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200자평
1980년대부터 여러 설문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 윤동주. 최근에는 그의 일생을 그린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가 인기리에 상연되었고, 연변에서는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선정하고 중문판 시집을 출간했다. 28년의 짧은 생애 중 유고 시집 한 권만을 남긴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지용 시인이 쓴 윤동주의 유고시집 서문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靑年 尹東柱는 意志가 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抒情詩에 優秀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强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孤獨 속에서 죽었고나! 29歲가 되도록 詩도 發表하여 본 적도 없이! 日帝時代에 날뛰던 附日 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無名 尹東柱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限이 없는 詩를 남기지 않았나? 詩와 詩人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은이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윤영석(尹永錫)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용(金龍)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배우며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교육받을 수 있었다. 당시 명동소학교를 함께 다닌 급우로는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후에 시인과 목사로 활동한 문익환(文益煥) 등이 있다.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의 교수들로부터 조선어와 조선 역사, 민족정신 등을 배우며 그의 시세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훌륭한 교수들로부터의 수업, 폭넓고 깊이 있는 독서, 그리고 사색에 몰두하는 산책을 통해서 윤동주는 주옥같은 시들을 완성해 나갔다. 연희전문 재학 중에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연희전문 문과학생회인 문우회의 문예부가 발행하던 잡지, ≪문우≫의 간사로 활동했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열아홉 편의 시를 수록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간을 계획했다. 그러나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등과 같은 작품들이 일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으로 본 스승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여 출판을 후일로 미루었다. 윤동주는 시고집 세 부를 직접 자필로 쓰고 제본해 그의 스승인 이양하와 후배인 정병욱, 그리고 자신이 한 부씩 나누어 가졌다.
1942년에 도일한 윤동주는 일본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미션계 사립대학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고 그해 가을 일본 개신교 조합교회파에 속하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7월 14일, 사상범 체포 전담반인 일본 특수 경찰 ‘특고(特高)’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1943년 12월에 발행된 ≪특고월보(特高月報)≫를 통해 확인된 윤동주의 죄목은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었다.
윤동주는 후쿠오카(福岡)형무소로 이송되어 붉은색 수의를 입고 사상범들이 갇히는 독방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가족들에게 요청해 받은 ≪영일(英日) 대조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옥고를 견뎌 나갔지만, 일제는 그를 생체실험의 도구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일제에 의해 ‘이름 모를 주사’를 매일 맞아야 했던 윤동주는 결국 외마디 소리를 높게 지르고는 옥중에서 타계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그의 나이 29세에 순교자적 생을 마감한 것이다. 고노 에이지(鴻農映二)는 1980년, ≪현대문학≫에 게재한 자신의 글에서 윤동주가 맞았던 ‘이름 모를 주사’가 “당시 규슈제대에서 실험하고 있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 주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엮은이
노승욱(盧承郁)은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황순원 문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와 인하대, 서울시립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황순원 문학의 수사학과 서사학≫(지식과교양사, 2010)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황순원 ≪인간접목≫의 서사적 정체성 구현 양상>, <1930년대 경성의 전차체험과 박태원 소설의 전차 모티프> 등이 있다.
차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序詩
自畵像
少年
눈 오는 地圖
돌아와 보는 밤
病院
새로운 길
看板 없는 거리
太初의 아츰
또 太初의 아츰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時間
十字架
바람이 불어
슬픈 族属
눈 감고 간다
또 다른 故鄉
길
별 헤는 밤
힌 그림자
사랑스런 追憶
흐르는 거리
쉽게 씨워진 詩
봄
밤
遺言
아우의 印像畵
慰勞
肝
산골 물
懺悔錄
八福
못 자는 밤
달같이
고추 밭
異蹟
비 오는 밤
窓
바다
毘盧峯
소낙비
寒暖計
風景
달밤
장
黃昏이 바다가 되여
아츰
빨래
꿈은 깨여지고
山林
이런 날
山上
陽地 쪽
닭
가슴 1
가슴 2
비둘기
黃昏
南쪽 하늘
蒼空(未定稿)
거리에서
삶과 죽움
초 한 대
산울림
해바라기 얼골
귀뜨람이와 나와
애기의 새벽
해빛·바람
반듸불
둘 다
거즛뿌리
눈
참새(未定)
버선본
편지
봄
무얼 먹구 사나
굴뚝
해ㅅ비
비ㅅ자루
기와장 내외
오줌싸개 지도
병아리
조개껍질
겨을
谷間
悲哀
薔薇 病들어
래일은 없다
비행긔
호주머니
개
고향 집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드려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 가 드려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病院 뒷뜰에 누어, 젊은 女子가 힌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려내 놓고 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알른다는 이 女子를 찾어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왓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안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않 된다.
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花壇에서 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病室 안으로 살어진다. 나는 그 女子의 健康이—아니 내 健康도 速히 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엇든 자리에 누어 본다.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 疊 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 주신 學費 封套를 받어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가?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 疊 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손가락에 침 발러
쏘−ㄱ,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ㄱ, 쏙. 쏙
아츰에 햇빛이 빤짝,
손가락에 침 발러
쏘−ㄱ,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ㄱ,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