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후대의 군자를 바로잡겠다
이 책은 왕부지(王夫之)·황종희(黃宗羲)와 함께 삼대 유로(遺老)로 알려진 고염무의 역작이다. 고염무는 일지(日知)의 의미에 대해 “내(고염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해 두었는데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때때로 다시 고쳤다… 자하(子夏)의 말을 취해 이름 짓기를 일지록이라 했으니 이를 통해 후대의 군자를 바로잡겠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일지는 ≪논어≫ <자장>의 “날마다 알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고 달마다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으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라는 구절에서 기원한다.
실패한 통치 기제의 원인 분석과 이에 대한 대안 모색
고염무는 명 왕조의 멸망을 과거 순기능으로 작용했던 통치 기제의 합리성이 붕괴된 결과로 판단했다. 특히 통치 이념으로서 성리학이 본래 지닌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측면이 쇠락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체제 내부의 문제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다. 왜냐하면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는 개인의 수양에 국한된 세계관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정치 과정에 진입한 학습된 관료들 역시 해결 능력의 부족 내지 통치 기제의 합리성에 대한 몰이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염무는 명의 멸망 원인 중 하나로 당시의 학술적 폐해를 지적한다. 즉 관념적·추상적 원리로 경도된 심학으로서의 이학(理學)의 폐해로부터 벗어나 경전에 대한 충실한 독서와 경전에 내포된 본래의 의미, 즉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취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적인 학문 태도로의 복귀와 이에 의거해서 학습된 인재의 등용을 통한 명 왕조의 부활이었다. 결국 이 책은 실패한 통치 기제의 원인 분석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의 모색이라는 정치 개혁론의 성격을 가진다.
200자평
‘매일 깨달음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책은 명 왕조의 멸망을 통해 통치 기제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고염무 자신의 정치적 문제의식까지 명료하게 드러내는 정치 개혁론이기도 하다. 전체 1021항목 중에서 고증의 사례, 정치제도, 사회·경제제도, 전통과 풍속, 경학 해석, 역사의식, 박문의 일곱 가지 세부 영역으로 구분해 총 69개 항목을 직접 발췌했다.
지은이
고염무는 명나라 만력(萬曆) 41년 강소성(江蘇省) 곤산(昆山)에서 출생해 청나라 강희(康熙) 21년 산서성(山西省) 곡옥(曲沃)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강(絳)이고 자(字)는 충청(忠淸)이다. 명나라 멸망 후 이름을 염무(炎武), 자를 영인(寧人)으로 고쳤다. 서명(署名)은 장산용(蔣山傭), 호는 정림(亭林)으로, 정림 선생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청대 고증학의 개조(開祖)로 평가되고 있다.강동 지역의 명망가 출신으로 계조부(繼祖父) 고소불(顧紹?)의 아들인 고동길(顧同吉)이 죽어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고소불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수절한 양어머니 왕씨(王氏)에게서 6세부터 ≪소학≫, ≪대학≫을 배우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적 명분론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4세에 제생(諸生) 자격을 취득한 후 고염무는 명나라 멸망 때까지 양조부의 교육과 지도하에 고전과 당대의 정치·경제에 대한 심도 깊은 학습을 받았다. 더욱이 초서(抄書)를 강조했던 양조부의 영향은 그의 3대 정치 저작으로 알려진 ≪일지록≫,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조역지(肇域志)≫ 찬술의 기초로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명나라 멸망과 함께 청 순치(順治) 원년(1644)부터 약 12년간 두 차례 무장투쟁과 비밀결사인 복사(復社)에도 간여했다. 이후 청조 출사를 거부하고 순치 14년(1657)부터 사망할 때까지 강남 지역을 떠나 “사방을 굽이굽이 2∼3만 리를 왕래하며 또한 기록을 열람한 것만도 1만여 권에 이르도록(往來曲折二三万里, 所覽書又得萬餘卷)” 하북·산동·산서·섬서 등 북방의 옛 제(齊)·노(魯)·연(燕)·조(趙)·진(晉)·진(秦) 지역을 여행하면서 역사와 경학의 고증과 음운 연구 및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평생 ≪일지록≫ 32권, ≪천하군국이병서≫ 100권, ≪음학오서≫ 38권 등 37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옮긴이
윤대식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대 중국의 유·법가, 조선 후기 실학, 한국 정치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고대 법가 철학과 조선왕조의 리더십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지록(日知錄)에 내포된 중국 실학의 정치적 의도와 조선으로의 유입 과정>(2004), <상앙의 법치주의에 내재한 정치적 의무>(2004), <맹자의 왕도주의에 내재한 정치적 의무의 기제>(2005), ≪17·18세기 조선의 외국서적 수용과 독서문화≫(2006, 공저), ≪동아시아의 정치적 의무관에 대한 모색≫(2008)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1. 고증(考證)에 관해
2. 정치(政治)에 관해
3. 사회·경제에 관해
4. 풍속(風俗)에 관해
5. 경학(經學)에 관해
6. 역사(歷史)에 관해
7. 박문(博聞)에 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두원개의 ≪좌씨전≫ 해석 또한 잘 지적하듯이 “법이 행해지면 사람이 법을 따르고 법이 실패하면 법이 사람을 따른다”고 했다.
−32쪽
당나라 제도에서 사면을 내리는 조서에는 “하루 500리를 행군해도 또한 열 개 역참으로 끝나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역참을 많이 설치했기 때문에 행군이 빠른데도 말이 피로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비용 절약을 이유로 점차 역참을 합쳐 버렸다. 70∼80리에 한 개의 역참이 있는데, 역에 이르자 말이 쓰러지고 관리는 도망가 버렸다. 이 일을 맡으면서 어찌 한 번이라도 이전 역사를 고찰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74~75쪽
나라의 보존은 군주와 신하, 그리고 귀족들이 도모하는 것이지만, 천하의 보존에는 필부와 같이 비천한 자들도 더불어 책임이 있다.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