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1931년 <우울(憂鬱)>과 <여름의 일순(一瞬)>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 임학수(林學洙, 1911∼1982)는 1930년대 초반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시인이자 영문학 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37년 시집 ≪석류(石榴)≫(1937)의 간행을 시작으로 해방 전 ≪팔도풍물시집(八道風物詩集)≫(1938), ≪후조(候鳥)≫(1939), ≪전선시집(戰線詩集)≫(1939)을 냈고, 해방 후에도 시집 ≪필부(匹夫)의 노래≫(1948)를 낼 정도로 활발히 시작 활동을 했다. 더욱이 그는 1930년대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김영랑, 박용철 등과 활동하면서 1933년 12월에 창간된 순수문학 동인지인 ≪문학(文學)≫에 참여하여 박용철과 함께 순수문학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 신석정, 김영랑, 유치환 등이 중심이 된 ≪신인문학≫의 동인으로도 참여했으며, 1939년 최재서가 주재한 ≪인문평론≫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뿐만 아니라 역시집 ≪현대 영시선≫(1939)과 소설 호메로스의 ≪일리어드≫(1940), 찰스 디킨스의 ≪이도애화(二都哀話)≫(1941)를 번역하는 등 번역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처럼 임학수는 1930∼1940년대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1930년대 후반 ≪전선시집≫과 같은 일제의 국책에 협력하는 문필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말년까지 북한에서 영문학자로서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일과 납북은 그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물론 1980년대 중반 해금 이후 그에 대한 논의의 길이 열리긴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논의는 빈약한 형편이다. 이로 인해 임학수 문학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유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시 세계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등한시되어 온 납·월북 문인의 연구를 통해 우리 현대 문학사의 총체적인 복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임학수 시인의 납북 이전의 평들은 대체로 서정성을 기초로 낭만적인 세계관을 보여 준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는 서정을 밑바탕으로 하여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보여 줄 뿐더러 일제 치하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슬픔과 절망을 그리고 있다. 그는 서정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설움과 절망을 그리면서도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하려 했다. 비관적 현실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믿었던 단 하나는 우수한 우리 민족의 문화와 거기에 깃든 정신이 우리를 희망의 날, 즉 그가 꿈꾸는 ‘새날’로 인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유시뿐만 아니라 기행시, 산문시, 풍물시 등과 같은 실험 정신이 엿보이는 시들을 통해 그날을 기원하고 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황군작가 위문단의 일원으로 전선을 시찰한 후 쓴 ≪전선시집≫으로 인해 친일 작가로 낙인찍히고,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의 문학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앞으로 그의 문학에 대한 많은 연구와 정당한 평가가 있길 기대해 본다.
200자평
1931년에 등단해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시문학≫, ≪문학≫, ≪신인문학≫, ≪인문평론≫ 등 동인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현대 영시선≫과 소설 호메로스의 ≪일리어드≫, 찰스 디킨스의 ≪이도애화(二都哀話)≫ 등 번역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임학수를 모른다. 1930년대 후반 ≪전선시집≫과 같은 일제의 국책에 협력하는 문필 활동을 했고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말년까지 북한에서 영문학자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친일과 납북으로 금기시된 그의 시, 이제는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때다.
지은이
임학수(林學洙)는 1911년 7월 3일 전남 순천군 순천읍 금곡리 214번지에서 부친 임화일(林和日)과 모친 이가절(李佳節)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임학수의 본명은 학수이나 영택(榮澤: 족보명), 악이(岳伊: 개명 전 이름), 내홍(乃洪: 보통학교 학적부 이명) 등 네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9) 선생은 그의 15대조이며, 할아버지 임계옥(林桂玉)은 부농으로 상당히 많은 소작 농토를 두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임화일은 신식 문명에 깨어 있었으며, 해방 전부터 순천 읍내에서 금방을 운영하여 임학수의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1936년 1월 임학수는 경성제대 동기 동창인 이정호의 누이동생 이호순(李浩順)과 연애결혼을 했으며, 1939년 경성부 청량리정 25의 7번지로 이사를 하면서 호적도 옮기고 그 후 몇 번 더 이사를 하면서 처 이호순과 채윤, 채강, 채문, 채령 네 딸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 장녀 채윤과 셋째 채문이 먼저 부산 동생네로 떠나고, 뒤이어 합류하기로 했던 임학수와 처 이호순, 그리고 두 딸은 납북되어 서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또한 임학수는 북에서 다섯째 딸 채성과 장남 채호를 슬하에 둔다.
순천공립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보를 거친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경성제대 영문학부를 다니며 주로 관심을 기울인 시인들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이나 셸리, 키츠 등이며, 이는 당시 영문학과 학과장이었던 사토 기요시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요시의 전공은 영국 낭만파 시였으며, 강의나 연구도 바이런, 키츠, 셸리 등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임학수의 졸업 논문 역시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셸리의 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였다.
임학수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제대 조교, 호수돈여고, 경신여고, 한성상고, 배화여고, 성신여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해방 후 고려문화사 주간과 ≪민성≫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는 서울사범대 교수, 1947년에는 숙명여대 강사, 1949년에는 이화여대 강사로 일했으며, 같은 해 고려대 교수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교수직에서 해임된다.
1931년 동아일보로 등단한 임학수는 이후 1951년 납북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시집 ≪석류≫, ≪팔도풍물시집≫, ≪후조≫, ≪전선시집≫, ≪필부의 노래≫ 등을 펴냈다. 뿐만 아니라 번역 시집으로 ≪현대 영시선≫, ≪19세기 초기 영시집≫, ≪초생달≫, ≪챠일드 하롤드의 편력기≫ 등을 남겼고,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 ≪시집, 조선문학전집10≫ 등이 있다. 번역물로도 ≪일리아드≫(상, 하), ≪이도애화≫, ≪세계단편선집≫(1, 2), ≪슬픈 기병≫ 등 10여 권이 넘는다. 그 외 소설, 희곡, 시 등의 번역 작품이 남아 있다.
그는 문단 활동도 활발히 했는데 ≪시문학≫ 동인으로 김영랑, 박용철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1933년 12월에 창간된 순수문학 동인지인 ≪문학≫에 참여하여 순수문학을 주도했다. 또한 1934년 노자영, 신석정, 김영랑, 유치환 등이 중심이 된 ≪신인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했고, 1939년에는 최재서가 주재한 ≪인문평론≫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82년 72세의 나이로 작고한 것으로 알려진 임학수는 김일성대학 어문학부 교수·학장 및 평양 외국어대학 영어과 강좌장을 지냈으며, 말년까지 교편을 잡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외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벌여 왔다고 북한에서 간행된 ≪문화예술사전≫(1989∼1993)에 기록되어 있다.
엮은이
윤효진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종군위안부 여성에 대한 재조명 – 노라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론>, <손창섭 소설의 인물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차례
≪八道風物詩集≫
人定閣
北漢山
南漢山城
崇禮門
慶會樓
八角堂
鐘路
南海에서
石窟庵
石窟庵 觀音像의 노래
高麗磁器賦
太極扇
朴淵
滿月臺
上八潭 古事
海金剛에서
天仙臺
叢石亭
落花巖
江西大墓 天神圖
雙楹塚 九人 供養圖
밤 停車場
萬波息笛
≪匹夫의 노래≫
棕櫚樹
겨울의 노래
自畵像
秋風嶺에 올라 北方을 바라며
搖籃
曠野에 서서
拉濱線 安家에서
哈爾濱驛에서
松花江
바다
散步
꿈
山居
別離
하이커의 노래
새날을 맞음
東方의 靈山
獅子
기다림
싸움
흐르는 불빛
落葉
나의 太陽
불을 켜라
즐거운 설날
데모크라씨
快晴
가까워 온다
行列
언제나 오느냐
閑山島
豫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千年 巖壁에 幽閉되여
불 꺼지고 微笑는 얼어
東海 새벽안개에 슷기고 깎일 제,
너 이마는 파리해
꽃다발 모다 시들었도다—
이제 실비 그윽히 속삭이고
외−ㄴ 山골작에
杜鵑聲 낭자한 밤,
…아득히 들 밖에
저 발굽 소리는 들려오나니!
저 방울 소리는 울려오나니!
키여라 횃불을.
열어라 石門을.
이제야 올려는 사랑의 달가움에
오, 저 얇은 紗 헷치고 반 나타나
사르르… 떠는 어깨와 함께,
와드득 깨미러
너 입살을 밝앟게 물디려라.
●갈매기 흰 구름으로 더부러 날르고
타는 아지랑이 미끄러지는 바람,
諸國을 廻航하는 船舶
나가며 들어오며
아득히 茫漠한 銀線 넘어로 點 되여 사라지는 곳
南海!
부셔라. 깨지라.
희롱하라. 탄식하라.
저곳 赤道를 거처 온 永遠의 물결이
金모래 조악돌을 쓸어 가고 내던지며
멀리 海岬에는 漁火 明滅하는
으스름달밤.
여기가, 여기가
북 울려 旗폭 날려
소스라친 波濤를 먹피로 물디리던 곳이어늘!
아, 孤島의 저믄 봄
나는 이제 무엇으로 이바지할꼬?
●꿈에서 살던 그대 이제야 오는다?
구름으로 繡놓아 별로 아로삭인
그대 象牙의 상자를 열으라.
하나는 自由.
하나는 平等.
꿈에서 살던 그대 이제야 오는다?
혹독한 쇠사슬과 주림, 暗黑,
이 두꺼운 獄門을 깨치라.
거리에는 넘치는 旗ㅅ발, 松門의 洪水,
씩씩한 行進과 嚠喨한 軍樂으로
가장 호사로히 嚴肅히 그대를 맞으리.
피는 뛰나니!
그대 맞는 기꺼움에
몸은 떨리고 귀에는 요란한 鐘소리 끊임없나니!
이 밤이 지내는 아침,
붉은 太陽이 山과 山 바다와 바다를 휩쌀 지음,
그대 燦爛한 金冠을 쓰고
蕯水 옛 싸움에 저 風雲을 희롱하던 칼을 춤추어
가장 儼然히
步武堂堂 내 앞에 나타나오리.
오, 自由!
一切가 平等!
隸屬과 傲慢과 缺乏과 이 악착함이
어찌 호사로운 그대 앞에야 다시 용납되오리?
이제 마침내 그대는 오나니,
이 地球의 가시덤불 위에
왼갓 罪惡을 淸算할 새날은 왔나니,
내 꿈에 살던 그대 永遠히 내게 있으라.
그대 華麗한 상자를 열어 흩으라.
●언제나 살기 좋은 날은 오느냐?
모든 機關을 우리 손으로
三홉의 쌀은 配給되고
겨레의 좀들 말끔히 쓸어 내
汚吏라 謀利라 하는 單語는 없어지고
電車는 타기 쉬웁고
汽車 旅行은 즐거웁고
들에는 豊年歌 들리고
工場은 연기 뿜고
言論과 集會는 自由
아해들 다 學校에 가고
뜰에는 薔薇 피고
女人들 快活해
일하기 즐거웁고 살기 즐거운
언제나 보람 있는 날은 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