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장 로랭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문학사조이자 문화현상이기도 했던 데카당티슴의 전형적인 인물이자, 세기말의 기이하고 병적인 취향들을 작품과 스스로의 삶 모두에서 구현한 작가다. 환상 작품에는 그의 이런 취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 환상 문학사에서 모파상의 뒤를 잇는 장 로랭의 환상 작품 8편을 엮었다.
<그들 중 하나>는 눈 오는 사육제 밤, 기차역 대합실에서 만난 가면의 이야기다. 화자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수도사인지 마녀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가면’ 때문에 당혹감과 오싹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어두운 밤 열차 안에서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 아니 자신의 가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 ‘가면’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면들 뒤에는 어떤 본능이, 어떤 욕망이, 어떤 소망이, 어떤 갈망이, 어떤 마음의 병이 숨겨져 있는 걸까?”
<어느 학생의 이야기>는 한 대학생이 자신이 사는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어떤 수상쩍은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주인공은 극장에서 우연히 두 여자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게 된다. 그녀들은 가면을 쓰고 자유롭게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고, 절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없이 군중과 서로 스치고, 팔을 부딪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음란한 즐거움을 맛보는 짜릿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며칠 뒤, 주인공은 드디어 마담 프라크의 정체를 알게 된다.
<가면>은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된다. 한 명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만난 집시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다. 동네 사람들에게 그녀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부엉이 같은 그녀의 얼굴이 가면이 아닌 진짜 얼굴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른 한 명도 비슷한 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그가 카페에서 만난 한 남자는 껍질을 벗겨 낸 것 같은 흘러내리는 살갗을 가지고 있었다. 가면 같은 그 살갗에 손이 닿았을 때 그게 그 남자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장 로랭의 환상 단편에는 가면으로 민낯을 가린 인물, 민낯이 가면보다 흉악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의 기묘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서 가면을 벗겨 내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흉악한 인간 본성을 들춘다.
200자평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활약한 작가 장 로랭의 단편 가운데 환상 작품 8편을 한 데 모았다. 작품마다 가면으로 민낯을 가린 인물, 민낯이 가면보다 흉악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장 로랭은 이들의 가면을 벗겨 내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흉악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 보여 준다.
지은이
장 로랭의 본명은 폴 알렉상드르 마르탱 뒤발이며, 1855년 8월 9일 노르망디의 페캉에서 태어났다. 1878년 파리의 법과대학에 들어갔지만, 그의 관심은 카페와 카바레의 예술가들, 파리의 밤거리, 보헤미안들이었다. 그는 문인들의 살롱에 드나들며 바르베 도르비, 레옹 블루아, 위스망스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을 만나면서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시, 소설, 비평, 동화, 희곡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로랭은 기이한 행동들과 도발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세기말의 전형적인 심미주의자이면서 댄디였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서슴없이 공개했으며, 에테르 중독자이기도 했다. 로랭은 세기말 파리의 모든 것을 구현한 인물이자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자신의 대표작 <므시외 드 포카스>(1901)의 주인공과 같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바르베 도르비를 모델로 삼은 <므시외 드 부그를롱>(1897)과 함께 데카당티슴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다수의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소니외즈>(1891), <붉은 입술의 여자>(1888), <방랑하는 악>(1902), <부자들의 죄>(1905), <필리베르의 집>(1904) 등이 있다. 장 로랭의 환상 작품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들은 <영혼을 마시는 사람들>(1893), <감각과 추억>(1895), <가면 이야기들>(1900)이라고 할 수 있다. 로랭의 환상 단편들은 데카당티슴과 모더니즘이 결합된 작품들로 프랑스 환상 문학의 계보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로랭은 건강 악화로 여러 번 수술을 받고, 1900년에는 요양을 위해 완전히 파리를 떠나 니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1906년 파리에서 사망한다.
옮긴이
노영란은 서울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파리 8대학에서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파리 3대학에서 쥘리앙 그라크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쥘리앙 그라크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고, ≪악마, 천년의 역사≫와 ≪쾌락의 역사≫, ≪모파상 환상 단편집≫, ≪고티에 환상 단편집≫을 번역했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그들 중 하나, 혹은 가면의 영혼
어느 학생 이야기
아무도 모르는 범죄
가면을 쓴 삼인조
가면
가면 속의 구멍
혼란스러운 밤
장갑 낀 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새틴으로 된 무도회 가면과 가짜 코, 가짜 수염, 수도사들의 두건을 쓴 사람들 속에서 가면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가면으로, 헷갈릴 정도로 사람의 얼굴을 그럴싸하게 흉내 낸 가면이었습니다. 그런데 흉내 낸 얼굴이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속눈썹이 없는 얻어맞은 눈, 피가 나는 늘어진 두꺼운 입술, 분홍색 흉터가 있는 뺨, 그리고 보기 끔찍했던 것은 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코가 뭉개진 비웃는 얼굴,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경직된 미소, 하지만 무엇보다 코가 없는 분홍색의 끔찍한 얼굴은 거죽이 벗겨진 얼굴 같은 인상을 주었죠….
그 가면이 너무 흉측하고, 너무 잘 만들어져서, 소리를 지르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면은 우리와 거의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가면이 너무나 끔찍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계속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가 온몸을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혐오감은 곧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그다음에는 불안감으로 변했습니다. 그 가면의 수치스러운 분홍색은 저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됐어! 이제 그만 가면을 벗어!’라고, 그 종이 가면의 정면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가면을 벗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신경이 곤두서자 대담해진 제 손이 그의 가면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제 손가락이 그의 살갗에 닿았고… 끔찍하게 불쾌한 기분, 순간적으로 너무 무서워서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쌍한 인간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막 나온 참이었습니다.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