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우리 문단은 평론가 최동호를 정신주의 시론, 극서정시론을 주창한 시론가로 평가하고 그의 시와 평론은 그 증명의 산물이다. 그의 시와 평론들은, 개인의 신경증적 감정에 몰입하여 서정의 깊이와 소통이라는 문학의 본질을 잃은 최근 시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며 그가 주창한 정신주의와 극서정시에 대한 시적 실체이자 비평적 실체로 제시되었다. 응축된 서정과 언어의 미학을 강조하는 시인이며 평론가, 동서양의 시학을 아우르는 연구자, 대중과 소통하는 고민하는 문학인으로 드러나는 다면적인 최동호의 모습은 견고하고 성숙한 서정주의자의 일관성 있는 정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문학적 행보는 시, 시인, 시학이론, 문학사 서술, 문학적 소통이라는 다섯 개의 중추 위에 서정시, 정신, 동양 시학이라는 균형 잡힌 첨탑을 세우는 과정으로 요해할 수 있다. ‘서정’이나 ‘언어’ 혹은 ‘정신’은 시의 본질(本質)이다. 본질은 누군가의 새로운 이해와 인식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최동호가 인식하는 서정과 정신 또한 시(詩)와 시학(詩學), 모든 시인과 독자가 공유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정신’, ‘서정시’는 시학의 본질적 의미에 충실하고 시의 창작과 향유의 현장을 포용하는 개념이다.
그는 서정시의 생명이 ‘서정시의 내적 구조’, ‘서정시를 완결시키는 구조적 견고성’에서 발원하고 이를 ‘서정시에 나타나는 갈등의 삼각형’ 구도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서정시에도 ‘주체−매개자−대상’을 꼭짓점으로 하는 ‘갈등의 삼각형’ 구조가 존재하며 이 세 요소가 형성하는 극적 긴장과 감정의 밀도가 시적 성취를 가늠한다고 했다. 서정시에서 시적 성취란 호소력, 생명력, 공감, 예술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윤동주, 김소월, 조지훈, 김춘수와 같은 대표 시인들의 시 분석을 통해 ‘갈등의 삼각형’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살피고 서정시의 갈등 구조와 극적 효과가 미학적 완결성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논증한 <서정시의 구조와 갈등의 삼각형>은 최동호의 서정시 개념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서정시는 주체의 자기동일성에서 출발한다는 시학의 고전적 정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주체, 화자, 대상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대의 서정시를 분석하는 그의 독자적인 입론이 드러난다.
갈등의 삼각형이 구현하는 현대 서정시의 또 하나의 요건으로 최동호는 ‘정신주의’를 제시한다. 한용운, 조지훈으로 이어지는 불교적 현실참여, 황매천, 이육사의 유교적 저항주의, 신석정, 김달진의 노장적·은둔적 초월주의, 윤동주, 김현승의 기독교적 정신주의, 김수영, 김지하, 황동규의 현실비판적 서정주의와 모더니즘적 서정주의, 이용악, 신경림으로 이어지는 토착적 서정주의 등이 현대시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신주의적 시의 계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최동호는 자신의 정신주의가 특정 시인이나 계통을 지칭하기보다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시화(詩化)시킬 수 있는 ‘힘’, ‘능력’이라고 했다.
생태주의의 1990년대와 디지털·사이버 현실의 21세기를 지나며 그는 새로운 정신주의, 새로운 서정주의로서 개념적 내포와 창작적 외연을 마련하고 있었다. “인간 부정의 위기에서도 그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자신의 본성을 극진히 실험함으로써 그 인간적 품격을 되찾을 때 주체적 인간이 구현”되고 “이지러진 인간의 욕망을 순화하고 절제시키는 힘”으로서 시인의 “생태적 상상의 힘은 어쩌면 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문명사의 미래를 좌우하는 마지막 원천”(<생태적 상상과 문명사적 전환>)일 것이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인간의 정신은 인간적 품격과 주체적 인간, 욕망을 절제시키는 힘, 문명사의 미래를 좌우하는 힘이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정신은 시에 담긴 정신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동서양의 고전을 종횡하여 자연, 인간, 본성을 고구(考究)한 그는, 한계에 부딪힌 인간 중심의 서구적 이성과 천지화육(天地化育)의 동양 사상이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의 원칙’에서 조우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극한 성실함을 행하는 이상적 인간형이 우주, 지구, 생태를 위해 필요한 시대에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는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의 핵심을 간파하고 용기 있게 시화하는 시인의 정신일 것이다.
200자평
평론가로서 최동호는 꾸준하고도 일관되었다. 꾸준함과 일관됨은 모두 좋은 평론가의 미덕이다. 꾸준해야 일관될 수 있고 일관되어야 깊을 수 있고 깊어야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의 ‘정신’, ‘동양 시학’, ‘극서정’의 화두를 증명하고 완성할 일이 그에게는 남아 있다. 특유의 꾸준함과 일관됨으로 성취될 그 열매는 우리 시사의 비옥한 자양이자 도전적인 미래가 되어 줄 것이다.
지은이
최동호(崔東鎬)는 1948년 8월 26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수원을 출발점으로 하여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삼천포·여수·목포 등 지방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남창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며 도서부장과 문예반원으로 활동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만화와 더불어 아동 세계 위인전 100권을 독파했고, 서울로 진학하여 고등학교 입시를 끝낸 뒤에는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목포 유달중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별명이 ‘철학자’였을 정도로 문학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에도 심취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2학년 가을 동급생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 시를 쓰는 문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66년 조지훈 시인이 있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해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를, 박사 과정을 밟는 중에는 고려대 문과대 강사와 경신고등학교 야간부 임시교사를 지냈다. 경남대 국어교육과 전임강사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거쳐 1988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로 부임했다. 현재는 고려대 명예교수 겸 경남대 석좌교수로 있다.
시인으로서 첫발은 1976년에 내디뎠다. 대학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시작 노트를 정리해 열화당에서 ≪황사 바람≫을 발간한 것이다. 이후 ≪아침 책상≫(민음사, 1988),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민음사, 1995), ≪공놀이하는 달마≫(민음사, 2002), ≪불꽃 비단벌레≫(서정시학, 2009), ≪얼음 얼굴≫(서정시학, 2011), ≪수원 남문 언덕≫(서정시학, 2014) 등 시집을 내며 한국의 대표 서정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은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꽃, 그 시적 형상의 구조와 미학>이 당선되면서 시작한다. 이후 동양의 문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론인 ‘정신주의 시론’과 ‘극서정시론’을 펼치며 뚜렷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그의 비평 정신은 시론집 ≪현대시의 정신사≫(열음사, 1985), ≪불확정 시대의 문학≫(문학과지성사, 1987), ≪평정의 시학을 위하여≫(민음사, 1991),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문학동네, 2000), ≪현대시사의 감각≫(고려대출판부, 2004),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문학동네, 2006),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서정시학, 2012), ≪정지용 시와 비평의 고고학≫(서정시학, 2013) 등에 담겼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합동 시집 ≪샘물 속에 바다가≫(문학사상사, 1987), ≪지상에는 진눈깨비 노래가≫(민음사, 1992), 자료집 ≪소설어 사전≫(공편, 고려대출판부, 1998), ≪정지용 사전≫(고려대출판부, 2003), ≪김수영 사전≫(공편, 서정시학, 2012), ≪백석 문학 전집≫(공편, 서정시학, 2012), ≪정지용 전집 1 시≫·≪정지용 전집 2 산문≫(서정시학, 2015), 산문집 ≪히말라야와 정글의 빗소리≫(작가, 2005), 평전 ≪그들의 생애와 문학, 정지용≫(한길사, 2008), 역서 ≪문심조룡≫(유협 지음, 민음사, 1992), 박사 학위 논문을 개정한 ≪한국 현대시와 물의 상상력≫(서정시학, 2010) 등이 있다.
문예지 ≪서정시학≫과 ≪미래서정≫을 창간했고, 한국시학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학회, 황순원학회 회장과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대산문화재단 이사를 지내는 등 한국문학 발전을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또한 김달진 시인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90년 김달진 시인 작고 1주기를 맞아 ‘김달진문학상’을 제정하고 운영위원장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진해에서 ‘제1회 김달진문학제’를 거행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1991년 소천이헌구비평문학상, 1996년 현대불교문학상(시 부문)과 시와시학상 평론상, 1998년 김환태평론문학상, 1999년 편운문학상(평론 부문), 2006년 대산문학상(평론 부문), 2009년 혜산박두진문학상과 고산윤선도문학상(현대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해설자
이상숙은 1969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정현종론>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2005년 제6회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2006∼2007년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서울산업대학교, 한경대학교에서 강사를 지냈다. 현재 가천대학교 글로벌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평론집 ≪시인의 동경과 모국어≫, 논문 <북한문학의 민족적 특성론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차례
정지용의 산수시와 은일의 정신
서정시와 정신주의적 극복
사실과 변혁 그리고 예술적 감동
동양의 시학과 현대시
소묘된 풍경의 여백과 기운생동의 시학
생태적 상상과 문명사적 전환
디지털 코드와 도깨비의 시학
서정시의 구조와 갈등의 삼각형
해설
최동호는
해설자 이상숙은
책속으로
시가 시인 바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체가 갖는 언어적·형식적 엄격성이 요구된다. 물론 전통적 의미에서 엄격성이란 1980년대의 해체주의와 민중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와해되어 버렸지만, 이제 1990년대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것의 창조 정신으로서 엄격성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시의 엄격성을 유지시키는 것은 언어나 형식만이 아니다. 외적 형식을 가능케 하는 절제된 정신을 기반으로 한 확고한 세계관이 이를 떠받치고 있어야 한다.
―<서정시와 정신주의적 극복>
동양의 시학은 가까이 있었지만 가까이할 수 없었고, 서양의 시사 주간지들은 멀리 있지만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수영을 포함한 당대 지식인들의 자기 한계였을 것이다. 김수영이 전통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한 것은 4·19를 겪고 난 <巨大한 뿌리>(1964) 이후부터인 듯하며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불과 몇 년 후에 <풀>(1968)이 쓰였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동양의 시학과 현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