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7세기 프랑스 고전극을 대표하는 작가들 가운데 코르네유가 국가적인 대의명분이나 이성과 같은 남성 중심의 가치를 강조한 비극을 주로 집필했다면, 라신은 정념에 사로잡혀 파국으로 치닫는 여성의 심리묘사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극에서 걸작을 양산한 두 작가에 비해 희극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둔 몰리에르는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쪽으로만 편향된 극작 성향을 보여 주지 않는다. 30편에 가까운 몰리에르의 작품 목록에서 여성이 제목에 사용된 예는 모두 여섯 편이고, 그중 가정과 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세 편이다. 특히 1672년에 발표된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은 5막 구성의 운문이라는 고전극의 기본적인 형식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작품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몰리에르 희극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문제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프레시오지테[(Préciosité): 재치 있고 세련된 것을 지향하는 17세기의 사회적이며 문학적인 경향] 경향이다. 세련된 풍속과 예절을 지향하는 프레시오지테 경향은 고상하고 다듬어진 언어와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며 문학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소설에서 장편 연애소설이 이 경향을 반영한다면, 연극의 경우 몰리에르의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은 <우스꽝스러운 재녀들>과 더불어 이 경향의 부정적인 측면을 희화화한 대표작이다.
1659년에 초연된 <우스꽝스러운 재녀들>은 단막극임에도 불구하고 몰리에르가 왕실의 신임과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 크게 기여한 작품이다. 소설적인 연애를 꿈꾸는 처녀들이 갖는 결혼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나, 사회적으로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을 배격하고 맹목적으로 상류층을 동경하는 속물적인 태도 등이 바로 몰리에르가 부각하려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13년 뒤 발표된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은 여러 측면에서 작가의 성숙한 변화를 보여 준다. 전자가 단막극에 불과했다면 후자는 5막으로 구성되었다. 작품 무대는 여전히 파리지만 시골뜨기 처녀들이 등장한 <우스꽝스러운 재녀들>과 달리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에는 중년의 필라맹트와, 시누이 벨리즈, 장녀 아르망드가 등장해 다양한 포부를 피력한다. 게다가 <우스꽝스러운 재녀들>에서 하인들이 펼친 즉흥 연기와 달리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에 등장하는 두 명의 문인 트리소탱과 바디우스의 대결은 <인간 혐오자>에 등장하는 알세스트와 오롱트의 대결 이후 가장 관심을 고조시킨 사교계 인사라고 볼 수 있다.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에 등장하는 아르망드와 앙리에트는 같은 부모를 둔 형제이면서도 결혼 문제에 있어 상반된 견해를 드러낸다. 모친 필라맹트로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은 장녀 아르망드는 결혼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여성이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가사에 얽매여 학문을 비롯한 정신 활동을 제한받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게다가 결혼이 남녀의 육체적 결합을 전제하므로 육체를 죄악시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하려는 자신의 기대와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다. 이에 반해 동생 앙리에트는 부부 간의 애정과 자녀 양육이 주는 소박한 행복을 옹호하면서 육체의 결합이야말로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우스꽝스러운 재녀들>과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에서 몰리에르가 보여 준 입장으로 그는 자칫 여성 전체를 무시하는 작가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내들의 학교>에서는 결혼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려는 남자들의 그릇된 편견을 고발하는 대목도 있어 그가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라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대 사례에도 불구하고 당대 파리의 사교계와 일부 연극인들은 몰리에르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이른바 <아내들의 학교>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런 차원에서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은 몰리에르의 여성관이 집약된 작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프레시오지테 경향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하고 희화화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다.
200자평
도시 부르주아의 허영과 과시욕을 풍자한 몰리에르의 마지막 5막극 국내 초역.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자극인 이 작품은 학문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며 겉치레뿐인 현학자들에게 눈이 멀었던 파리 부르주아 여성들의 허영심을 비웃고 있다. 학문이 진리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날 배움의 진정한 목적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은이
1622년 1월 15일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몰리에르의 본명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이다. 대표적인 몰리에르 전기 작가 그리마레에 따르면 소년기의 장 바티스트는 당시 파리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클레르몽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으며 에피쿠로스 철학에 동조하는 가상디(Gassendi)의 영향을 받았다. 20대에 접어든 장 바티스트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Madeleine Bejart)와 더불어 유명 극단(Illustre Theatre)의 창단에 참여했다. 몰리에르라는 예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643년부터다. 하지만 유명 극단은 이내 파산했고, 파리를 떠난 몰리에르 일행은 에페르농 공작의 후원을 받고 있던 뒤프렌(Dufresne)의 극단과 합류한다. 1653년부터 1657년 사이에 몰리에르의 극단은 콩티 공(公)의 후원을 받는다. 몰리에르의 극단은 왕제 오를레앙 공의 주선으로 1658년 10월, 최초의 왕실 공연에 성공하여, 이듬해 <우스꽝스러운 재녀들>의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1622년 2월, 몰리에르는 스무 살 연하의 여배우 아르망드 베자르(Armande Bejart)와 결혼하여 사회적 파장을 야기한다. 같은 해 12월에 공연된 <아내들의 학교>는 코르네유(Pierre Corneille)의 <르 시드> 논쟁 이후 가장 심각한 연극 논쟁에 휘말린다. <아내들의 학교 비판>과 <베르사유 즉흥극> 등으로 자신의 연극관을 변호하던 몰리에르는 문제작 <타르튀프>로 다시 한 번 격한 논쟁을 야기하며 급기야 공연 금지 처분을 받는다. 1666년 몰리에르는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인간 혐오자>를 무대에 올려 <타르튀프>, <동 쥐앙>과 더불어 성격희극의 3대 걸작을 완성한다. 1668년에는 <앙피트리용>을 필두로 <조르주 당댕>, <수전노>를 연속으로 무대에 올리는 역량을 과시한다. 1673년 2월 17일, 발레희극 <상상으로 앓는 환자>의 네 번째 공연 후에 쓰러진 몰리에르는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영면한다.
옮긴이
이경의는 1962년 인천에서 태어나 부평에서 초·중·고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서강대학교에서는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며 연극 장르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파리 4대학에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고전극의 연구를 시작하여 몰리에르 연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과정과 박사준비과정을 이수한 데 이어 1994년 <17세기 프랑스 희극에 등장하는 바르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부터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프랑스 문학사를 비롯하여 프랑스 연극과 영화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작품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그럼 너는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가사에만 얽매여
다른 기쁨을 전혀 모르는
하찮은 사람이 되겠다는 거야?
그런 수준 낮은 유희는
저속한 속물들에게 맡겨 두고
눈높이를 더 올려서
고상한 것을 즐기는 취향을 가져야지.
2.
저는 여자가 모든 걸 알려고 하는 건 이해하지만
유식하려고 유식한 체하려는
황당한 욕심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3.
나한테 필요한 식사는 전혀 모르면서
쓸데없는 지식은 왜 그리 많이 알려고 하는지.
심지어 하인들조차 여인네들의 환심을 사려고
할 일은 안 하고 학문을 동경하고 있으니 큰일이야.
모든 식구들이 추론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합리적인 이성이 설 자리가 있나!
어떤 놈은 역사책을 읽다가 내 고기를 태우고
또 어떤 놈은 마실 것을 찾아도 시구에나 골몰하고 있으니
모두 여자들을 따라 해서 이 모양이야.
4.
그들은 학계에서 비범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한 것을 알려고 애쓰고
30년간 공부한 사람처럼 식견을 가지려 하고
수많은 밤을 새워 공부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서투르게 쓴답니다.
이런저런 책에서 얻은 잡동사니 지식으로
그들의 머리를 희미하게 채우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학식에 도취한 나머지
듣기 거북하게 자기 장점을 늘어놓지만
상식이 결여되어 아무 쓸모가 없고
우스꽝스러운데다 무례하기까지 해서
도처에서 예지와 학문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