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하운(何雲)은 호다. 구름처럼 흩어져 떠돌며 사는 문둥이라는 뜻이다. 일제 말 노골화한 군국주의 현실에서 심해진 나병이 목숨을 위협했으나 문학은 그를 구원해 준 마지막 힘이었다. 한하운의 ‘인간 폐업’에 대한 자기 인식은 타나토스(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그득하다. 하늘이 내린 형벌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그의 ‘울음’은 높은 산에 에워싸인 채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뉘우침”의 회한으로 “통곡한다”. 그의 ‘울음’은 ‘인간 폐업’이란 극단적 자기 인식에서 드러나듯, 개인의 실존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부재’ 자체인 것이다. 그는 시에서 문둥이를 어둠의 세계에 유폐하지 않는다. 문둥이의 숙명을 기꺼이 수용하는 인간 존재의 삶을 향한 에로스의 욕망을 불태운다. 따라서 대표작 <全羅道 길>에 등장하는 ‘붉은 황톳길’은 죽음의 길이 아닌, 문둥이들끼리 신생을 향해 가는 생명의 길로 읽힌다.
200자평
한하운(1919~1975) 시를 읽는 것은 처절한 고통과 대면하는 일이다. 이 고통은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를 엄습해 오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살을 저미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한하운은 이른바 ‘문둥이 시인’이다. 평생 나(癩)환자로서 천형(天刑)의 삶을 살았다. 그의 시 곳곳에는 문둥이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울음이 배어 있다.
지은이
한하운(韓何雲)은 191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永)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으로서는 입학하기 힘든 함경남도의 이림농림학교의 축산학과에 합격했다. 이때 일본어로 된 ≪시론(詩論)≫과 ≪시학(詩學)≫, ≪시작강좌(詩作講座)≫를 읽으면서 시를 습작했다. 그러면서 바이런, 하이네, 릴케, 타고르, 워즈워스, 베를렌 등의 시를 읽으면서 시 공부를 했다. 축산학과를 다니면서 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습작하던 한하운은 193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나병 확진을 받는다. 이후 그는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유학 도중 나병이 악화되어 귀국하고, 금강산에서 요양을 한다. 그는 나병을 앓으면서 애인과의 실연, 삶에 대한 환멸 때문에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간다. 그는 북경대학교 농학원 축목학계(畜牧學系)에 입학해 졸업을 한 후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근무하다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본명인 ‘태영’을 버리고, ‘하운’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채 문학에 정진한다. 일제 말 노골화한 군국주의 현실에서 심해진 나병이 목숨을 위협했으나 문학은 그를 구원해 준 마지막 힘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뒤 북쪽에서는 소련 군정이 실시되었고, 그는 아우와 함께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시와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소련 군정으로 인한 경제 혼란과 이념의 억압 속에서 함경도 학생들 중심으로 1946년 3월 13일 함흥학생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사건 혐의자로 감옥에 갇혔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월남했고, 다시 북으로 넘어갈 때 체포 – 투옥되었지만 이감 수송 중 원산에서 탈출해 월남했다. 그는 ‘나시인(癩詩人) 한하운 시초(詩抄)’라 하여, <전라도 길>, <별>, <목숨> 등 시 13편을 ≪신천지(新天地)≫ 1949년 4월호에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정음사에서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간행했다.
1950년 강원도와 황해도를 배회하다가 경기도 부평에 나환자 수용촌 성계원을 건설하고 자치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나환자를 위한 사회적 봉사와 나병 퇴치 노력, 즉 나해방(癩解放)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954년 대한한센총연맹을 결성해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 역시 그 일환이다. 이후 그의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가 1955년에 인간사에서 간행된다. 그리고 그동안 연재되던 <나의 슬픈 반생기>가 1958년에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란 제목으로 인간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나병이 음성으로 판명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1960년에 한미제약회사를 창립하는가 하면, 같은 해 7월에 서울 명동에 무하문화사(無何文化史)란 출판사를 설립했고,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을 간행했다. 1964년 7월에는 나병 해방을 위한 원대한 취지에서 월간 ≪새 빛≫을 창간했고, ≪정본 한하운 시집≫을 무하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0년대는 한하운이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보인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71년 한국카톨릭사회복지협의회를 결성해 회장에 취임한다. 1973년에 한하운 시비가 소록도에 세워졌고, 1975년 2월 28일 간경화증으로 인천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엮은이
고명철은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비평사와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1998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 연간지 ≪비평과 전망≫ 및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반 연간 ≪바리마≫, ≪리얼리스트≫ 및 계간 ≪리토피아≫ 편집위원으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칼날 위에 서다≫, ≪비평의 잉걸불≫, ≪‘쓰다’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보리피리≫(人間社, 1955)
國土 遍歷
靑芝有情
踏花歸
明洞 거리 2
부엉이
무지개
海邊에서 부르는 波濤의 노래
三防에서
리라 꽃 던지고
楊子江
悲愴
秋夕 달
觀世音菩薩像
癩婚有恨
人骨笛
≪韓何雲 詩 全集≫(人間社, 1956)
全羅道 길
손가락 한 마디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罰
목숨
데모
열리지 않는 門
파랑새
삶
막다른 길
어머니
明洞 거리 1
비 오는 길
自畵像
개구리
꼬오·스톱
洋女
자벌레의 밤
業果
秋雨日記
秋夜怨恨
나
봄
女人
愁愁夜曲
何雲
追憶 1
追憶 2
昌慶苑
故鄕
버러지
冷水 마시고 가련다
≪定本 韓何雲 詩集≫(無何文化社, 1964)
靈歌
서울의 봄
도라지 꽃
漢江水
落花流水
시집 미수록 작품
明洞 거리 3
恩津彌勒佛
세월이여
五馬島
1964년 우리 생의 전쟁을 하자
새 빛
自有黨
제13회 세계 癩者의 날에
제14회 세계 癩者의 날에
인간 행진
巨木은 거목
행복
春日遲遲
낙엽
포인세티아 꽃
春蛙
파고다공원
한국기독교球癩會 창립총회
삼월의 노래
≪새 빛≫ 지령 100호
哭 陸 女史님 영전에
나병의 날에
白木蘭 꽃
到處春風
新雪
旅愁
刑月
歸鄕
戀主님
쉬이 문둥이
솜다리 꽃
山 가시내
라일락 꽃
천하대장군ㆍ지하여장군
白鳥
輪廻
驪歌
思鄕
한여름 밤의 氷宮
작약도
고구려 무용총 벽화
상달
양갈보
大漢門 앞의 밤
어머니 생각
꽃
50년 찬가
校歌
噫 50년
부평 지역 청년단체연합회에 부친다
祈願
回心
今 6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全羅道 길
– 小鹿島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全羅道 길
≪초판본 한하운 시선≫, 고명철 엮음, 37∼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