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광섭 시선
봄
어름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은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距離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相見禮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지는 봄 해를 따라
몇 천 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 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 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초판본 김광섭 시선≫, 87~88쪽
봄은 돌아오는 계절이다.
멀리 간 것이, 서운하게 갈라진 것이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