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내다
데이터로 읽는 예술, 알고리즘이 바꾼 미술사의 질문
디지털 기술이 창작의 정의를 바꾸기 시작하다
AI가 렘브란트를 다시 그리는 시대, 미술사는 더 이상 과거를 해석하는 학문에 머물지 않는다. 〈더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에서 보듯, 수백 점의 작품을 데이터로 분석해 화풍을 정량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술은 예술의 정의 자체를 흔든다. 예술은 더 이상 인간의 손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 그리고 인간의 의도가 결합된 복합적 산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예술 창작과 해석의 방식 자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탐구하며, ‘디지털 미술사’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더불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아름다움, 창작 의도, 수용자의 경험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통해 AI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균형 있게 분석한다. 칸트의 미학, 뒤샹의 레디메이드, 현대 미술의 개념 중심 흐름을 연결하며, AI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철학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인간 예술가의 역할, 그리고 감상자가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새로운 예술 경험을 주목한다.
나아가 미술사를 연구하는 방식 자체의 전환을 제안한다. 영상 처리, 네트워크 분석, AI 기반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작품을 ‘텍스트’가 아닌 ‘데이터’로 읽어내는 새로운 리터러시를 소개한다. 이는 사료 중심의 전통 미술사가 놓쳐 온 영역을 보완하고, 미술사를 기억의 학문이 아닌 탐구와 재구성의 학문으로 확장하는 시도다. 디지털 미술사는 단순한 기술의 적용이 아니다. 새로운 질문을 만들고,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우리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기록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책이다.
200자평
이제 예술은 붓이 아니라 알고리즘과 프롬프트를 통해 만들어지며, 창작의 기준 또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칸트와 뒤샹 이후 확장되어 온 예술 개념은 AI 시대에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아름다움, 창작자의 의도, 수용자의 경험이라는 기준 속에서 AI가 만든 작품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예술을 어떻게 다시 정의하는지를 묻는다. 렘브란트의 화풍을 학습해 새로운 작품을 생성한 사례에서 출발해, AI와 데이터가 창작의 조건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기술을 예술가로 보지 않으면서도, 기술이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핵심 도구임을 강조한다. 작품을 데이터로 읽어내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내는 디지털 미술사를, 기억의 학문에서 탐구의 학문으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리터러시를 제시한다.
지은이
김민서
경희대학교 문화엔터테인먼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디지털 미술사, 엔터테인먼트 컴퓨팅, 문화콘텐츠 개발이며, 영상처리기법, 사회 연결망 분석, AI 등 정량적 분석을 활용한 콘텐츠 분석 및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Visualization of Dynamic Network Evolution with Quantification of Node Attributes”, “Complementary Quantitative Approach to Unsolved Issues in Art History”, “A Socio-Scientific Analysis of the Artistic Originality of Tanwŏn Kim Hongdo”, “A New Method for Museum Archiving: Quantitative Analysis Meets Art History”, “디지털 미술사의 발전과 효용 가치 연구”, “예술 분야에서 양적 분석의 효용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차례
디지털 미술사가 필요한 이유
01 화풍을 ‘정량화’하는 ‘데이터’
02 화풍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03 영상 처리를 활용한 화풍 분석
04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사건
05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스승 논쟁
06 17세기 화가들의 ‘델프트 블루’
07 ‘모양’을 ‘형태’로 바꾸는 방법
08 김홍도의 ‘특별함’을 고취한 ‘평범함’
09 생성형 AI 미술의 명암
10 디지털 미술사의 학문적 가치
책속으로
사료 중심의 전통적 미술사 방법론에 비해 디지털 미술사의 정량 분석은 완벽한 결론을 담보할 수 없다. 제아무리 정치한 분석 결과를 제시한다 해도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결코 확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술사적 난제 앞에 마냥 멈춰 있을 수는 없다. 공학적 분석을 비롯한 여타의 방식들을 정성껏 고안해 지견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 사실 사료 또한 절대적이거나 전체적인 진실을 제공하지 않으며, 심지어 편향까지도 고스란히 전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료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존재하는 까닭에 사료가 부족한 화가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집요하게 탐구해야만 한다.
“디지털 미술사가 필요한 이유” 중에서
정량적 분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치화(數値化)와 정량화(定量化)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과학 기기를 활용해 미술품을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를 산출(算出)하는 것은 수치화에 해당한다. (…) 그런 점에서 수치화는 과학적 접근을 위한 필수조건이자 디지털화의 개념적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정량화는 수치화할 수 있는 새로운 데이터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하며, 영상처리기법을 통한 정량 분석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공학적 분석으로도 불리는 영상처리기법은 다양한 알고리즘을 통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었던 미술품 속 붓터치(brushstroke), 색, 표면 질감(texture), 잔금(craquelure) 등을 추출한다. 특히 그간 데이터의 범주로 포괄하지 못했던 정성 데이터를 ‘분석 가능한 데이터’로 변환함으로써 문제나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이는 곧 수치화의 토대가 된다.
“01_화풍을 ‘정량화’하는 ‘데이터’” 중에서
영상처리는 컴퓨터를 이용해 디지털화된 영상 정보를 처리하는 분야로, 의학, 생체 계측, 보안 기술, 군사 분야에서만 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자 인식, 자율 주행, 기상 분석 등 일상생활 전반으로 보급되면서부터 미술품 분석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Image Processing for Artist Identification(IP4AI)’ 워크숍이 바로 그 발단으로, 이들은 미술품의 디지털 이미지를 영상처리로 분석하여 진위 판별에 응용하고자 했다. 이에 반 고흐의 회화 총 101점을 고화질로 스캔하여 디지털화한 후, 붓터치의 길이, 폭, 방향 등의 특성을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웨이블릿 변환(wavelet transform) 계열의 알고리즘을 개발했으며, 이를 반 고흐의 위작과 원작 속 붓터치를 비교하는 데 활용했다.
“03_영상처리를 활용한 화풍 분석” 중에서
화가들은 자신만의 특이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훈련을 거듭하며 정성을 쏟는다. 숙련된 이후에는 일필휘지로도 그 진수를 발휘할 수 있으나, 대개의 경우 전달의 매개가 되는 소재를 충분히 묘사하고자 투입한 노력의 양, 즉 화폭에 남은 무수한 흔적으로 그 공(功)을 갈음할 수 있다. 반면 위작자는 미술품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들, 그중에서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것들만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원작자에 가닿을 수 없다. 미술품의 아우라는 화가 본인이 감각의 정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획득할 수도,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인도〉의 눈동자에 내재된 힘 또한 일견에는 추상적 감상처럼 보이지만 실상 화가가 얼마나 정성껏 혹은 능숙하게 붓칠을 가했는지를 통해 켜켜이 쌓인 감각의 깊은 층위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원작자의 아우라를 대변할 수 있는, 혹은 등가로 치환 가능한 작품 속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감식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04_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사건” 중에서
베르메르의 화풍적 특성은 그의 스승을 추정하는데 요긴한 바탕을 제공한다. 당시 도제 제도의 특성상 사제 관계라면 기법 면에서 화풍적 유사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선과 색은 미술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자 화가가 자주 구사하는 것인 만큼 무의식적 습관이나 신체적 특성들이 곧잘 반영된다. 오랜 시간 스승의 화풍을 연습했거나 작품 제작을 도운 상황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사한 방식이 손에 익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베르메르와 스승 후보들의 화풍 비교는 그들이 구사했던 붓터치와 당대 유행하던 델프트 블루(delft blue) 색상에 근간했다. 먼저 베르메르와 스승 후보들이 특징적으로 구사한 붓터치의 두께, 방향, 질감 등을 평균값으로 도출하여 비교한 결과, 베르메르와 테르 보르흐만이 유사한 붓터치를 구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델프트 블루의 색상 분석에서도 테르 보르흐와 베르메르만이 육안으로 식별하지 못할 정도의 유사한 색을 사용했다.
“05_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스승 논쟁” 중에서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을 계기로, 부유한 상인들의 수집품이었던 중국 자기는 점차 중산층에게까지 보급되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풍으로 집을 장식했고, 일반의 폭발적 수요는 곧 공급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하면서도 유럽식 문양과 네덜란드의 풍경을 담은 델프트 자기와 타일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 즉 당시 화가들은 명도가 높으면서도 과하지 않은 채도를 가진 델프트 블루의 정제된 색감에 매료되었고, 각자의 화풍과 회화적 전략에 따라 이를 재현할 수 있는 고유한 방식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처럼 자신만의 색상을 구현하는 것은 화가의 예술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아무에게나 쉽게 공유하고, 전수할 수 없는 부분인 만큼 색상의 유사성은 화가 간 영향 관계를 유추하거나 방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17세기 황금시대를 견인했던 화가들의 파란색을 정량적으로 비교하면, 각 화가가 구사한 파란색의 유사성을 측정할 수 있다.
“06_17세기 화가들의 ‘델프트 블루’” 중에서
반면 이렇다 할 스승이 없는 데다 무반 서얼 출신이었던 김홍도는 화원 가문의 구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적 정체성의 부재가 도리어 풍속화, 산수화, 도석화, 인물화, 병풍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기량을 발휘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더욱이 보수적인 회화관을 가졌던 영조와 달리 회화를 통해 혁신을 꿈꿨던 정조는 그의 예술 세계를 집대성하는 데 필요한 비옥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개인의 남다른 창의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찬양받기 위해서는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지지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당시 화원들과 김홍도가 얼마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화풍을 구사할 수 있었느냐는 타고난 재능 유무를 떠나 그들이 처한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홍도의 특별함을 고취했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08_김홍도의 ‘특별함’을 고취한 ‘평범함’“ 중에서
일반적으로 ‘디지털’은 아날로그 방식에 비해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고, 명확하고, 정밀하며, 유용해야 함을 상정한다. 때문에 디지털 미술사는 전통 미술사에 비해 늘 실용적 목적을 견지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실용적 용도 덕분에 우리는 디지털 미술사가 추동해 내는 학문적 성과들을 손쉽게 사회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다. 디지털을 매개로 한 연구 모두를 디지털 미술사의 영역으로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미술사는 전통 미술사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거나 미술사 본연의 사명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고유한 역할과 의미를 탐색해 나가야 한다. 기술을 앞세워 전통 미술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과장된 몸짓은 자칫하면 디지털 미술사가 선사하는 새로운 통찰까지도 상쇄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 미술사는 일차적으로는 미술사를 위한 ‘도구’로서 기능해야 하며, 그렇다고 ‘도구일 뿐’으로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10_디지털 미술사의 학문적 가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