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간은 기계다’
인간 정의를 새로 쓴 계몽 시대의 전위
계몽의 시대는 인류의 오랜 미망과 통념을 허물고자 한 도전의 시간이었다. 라 메트리는 이 들끓는 시대의 전위였다.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면서 인간에 대한 해묵은 정의를 무너뜨리려 했다. 인간이 생물학적 기계라는 파격적 선언으로 몸과 마음, 인간과 비인간 사이 위계를 뒤흔드는 사유의 장을 열었다. 그러나 라 메트리의 사상은 지성사적·역사적 맥락을 유실한 채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에 갇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인간의 자기 정의가 전복되는 지금, 라 메트리라는 창을 통해 현재를 들여다볼 때다.
이 책은 라 메트리의 도전적이고 선구적인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라 메트리의 삶과 사유를 지성사적·역사적 맥락과 함께 소개한다. 종교계와 의료계에 대한 라 메트리의 통렬한 비판, 그 결과 마주한 혹독한 시련,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비호 등을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주저 ≪인간-기계≫를 중심으로 라 메트리의 입론과 논지를 해설, 평가한다. 라 메트리가 당대 과학·철학과 주고받은 영향, 인간다움과 도덕에 관한 라 메트리의 생각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현대 유물론과 뇌과학에 앞서 인간의 중심성을 해체한 라 메트리에게서 사상의 해방적 힘을 발견해 보자.
쥘리앵 오프레 드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
18세기 프랑스 출신의 의사이자 철학자다. 자연과학의 발전, 계몽주의 등 근대 지성사의 격변기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삶을 살았다. 당대의 대표적인 유물론자로서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의 지평으로 환원해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로 재정의했다. 혁신적 사유에 기반해 당대의 의료 관행, 종교적 통념 등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로써 모든 저술이 분서 처분되었을 뿐 아니라 고국을 떠나야 했다. 오랫동안 ‘기계적 유물론’ 등 부정적으로 고착화된 평가를 받아 왔으나, 뇌과학이 부상하고 통섭적 지성이 요청되는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20세기 이후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인간-기계(L’Homme Machine)≫(1747)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그 밖에 ≪영혼론(Traité de l’âme)≫(1745), ≪인간-식물(L’homme plante)≫(1748)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200자평
라 메트리는 인간이 생물학적 기계라는 파격적 선언으로 통념을 뒤흔든 계몽 시대의 철학자다.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며 당대의 의료 관행, 종교적 통념 등을 거세게 비판했다. 열 가지 키워드로 라 메트리의 도전적 삶과 사유를 지성사적·역사적 맥락과 함께 소개한다.
지은이
이병태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정치·문화 등의 영역과 관련된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으로, 마르크스·유물론과 함께 20세기 초 한국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공저로는 ≪메타버스-확산의 예감≫(2022), ≪길 위의 우리 철학≫(2018),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2015) 등이 있으며, “인간의 거울, ‘로봇’: 기술지배시대의 독법과 교양교육”(2024), “‘유일자’의 철학과 사적 유물론의 마주침: 『독일 이데올로기』 3장 ‘성 막스’에 나타난 맑스의 슈티르너 비판”(2023), “라 메트리의 유물론, 그리고 그 너머: 「인간기계론」을 중심으로”(2021), “한국 현대 사상사의 재조망과 ‘모더니티’: 20세기 전반 유학사 저술을 중심으로”(2021)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라 메트리의 도전
01 의사 라 메트리
02 통렬한 비판과 그 대가
03 계몽주의
04 ‘기계적 유물론’
05 인간-기계
06 과학
07 철학
08 휴머니티
09 도덕
10 21세기의 라 메트리
책속으로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뇌과학이, 철학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유물론이 급부상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돌이켜 볼 때 그 근대적 기원 가운데 하나인 라 메트리의 이론이 그러한 첨단 이론들과 핵심적 문제의식을 공유함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라 메트리의 유물론과 뇌과학 그리고 현대 유물론은 ‘몸’과 ‘마음’, ‘물질’과 ‘의식’, ‘뇌’와 ‘사유’, ‘인간’과 ‘기계’ 등 핵심 개념들을 공통으로 간직하며 그 중심이 되는 논의·쟁점 또한 이 주제들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라 메트리에 대한 재조망은 지나간 철학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그 이상의 의미를 띨 수 있다. 라 메트리의 사유가 현대 이론의 문제의식과 그 속에 포함된 질문에 대해 놀랄 만한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잖은 영감과 실마리를 품고 있는 까닭이다.
_“라 메트리의 도전” 중에서
라 메트리는 특히 도전적인,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발적인 계몽주의자였다. 칸트처럼 차분한 논리나 온건한 접근 방식을 갖춘 이들도 있었지만 라 메트리는 그들과 확실히 달랐다. 교회든 의료계든 상대방을 비판할 때 대체로 ‘조롱’의 방식을 선호했다. 더욱이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망설임 없이 드러내곤 했다. 레이던에 머물 때 발표한 ≪인간-기계≫는 라 메트리의 관점이 지닌 파격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의 대표작이다. 라 메트리는 늘 급진적인 생각을 풍자와 희화화의 방식으로 거침없이 공개했다. 결국 라 메트리의 사유는 내용과 형식 모두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 메트리는 교회를 비롯한 보수적 집단에 공격당했을 뿐 아니라 ‘계몽’이란 기치를 공유한 지성들에게도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_“03 계몽주의” 중에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자연의 창조자이자 계시를 만든 자”로서 자연과 계시에 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성을 부여한 자다. 하지만 이성의 장소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며 “몸”은 신의 피조물 또는 자연적 존재라는 점에서 계시를 함축하는 텍스트 그 자체다. “계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을 부정”하는 것일 수 없는 까닭이다. 일부 신학자는 유물론자들이 고귀한 “우리의 영혼을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한다고 비난하지만, 라 메트리는 인간의 “비천한 기원”이 인간과 그 영혼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손상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가장 직접적이고 명료한 대상 그리고 그에 관한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신앙은 라 메트리가 보기에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다.
_“05 인간-기계” 중에서
인간이 번성한 시간 또한 ‘인류세’로 상대화되며, 그러한 인식이 널리 수용되고 있다. 무한과 영원에 가닿으려는 인간 사유의 비상과 그 깊이는 ‘뇌’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지평에서 규명되어야 할 현상일 뿐 더 이상 신비로운 영적 특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역사적으로 자기 정의가 전복되는 시점을 통과하고 있다. 라 메트리는 거의 3세기 전에 이러한 전복을 시도한 이다. 라 메트리의 파격적인 입론이 그의 시대에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지금은 ‘창’이다. ‘라 메트리’라는 창은 낡은 듯하지만, 이는 우리의 현재를 직시하기에 충분히 투명하다.
_“10 21세기의 라 메트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