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베쓰야쿠 미노루의 〈부서진 풍경〉(1976) 은 일본 소극장 연극이 전위적 실험에서 대중적 확장기로 넘어가던 시기, 작가가 새로운 문체와 세계를 모색하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1960년대 일본의 소위 ‘소극장 1세대’였던 그는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모순이 뒤섞인 시대 공기를 날카롭게 흡수하며,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초기작들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연극계는 저항의 기운보다 개인의 불안, 일상의 난센스, 희극적 감수성으로 기울었고, 베쓰야쿠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내면적 부조리와 희극성을 새롭게 결합하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 갔다.
〈부서진 풍경〉은 그 전환의 정점에서 쓰인 작품이다. 이전 희곡들에서 베쓰야쿠의 상징으로 자리해 온 ‘낡은 전신주’ 대신, 무대 중앙에는 뜻밖에도 화려한 비치파라솔이 세워진다. 환락과 소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물은 곧 전개될 이야기의 공허함과 부조리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며, 작가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상징체계를 어떻게 갱신했는지 보여 준다.
대화는 일상어를 사용하지만 실체가 없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저야 괜찮지만…”, “그냥 잘 모르겠지만요” 같은 흐릿한 말투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시에 숨기기 위해 발화되고, 인물들 사이의 소통은 허공을 맴돈다. 처음에 망설이던 인물들은 “다 같이 하면 괜찮다”, “문제가 생기면 변상하면 된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로 타인의 피크닉 자리를 점령하고, 점점 더 대담해진다.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집단의 이름으로 결정을 정당화하는 이 구조는 전후 일본 사회의 의식과 겹치며,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태도다.
‘여 1’, ‘남 2’ 등 익명적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은 결국 관객을 향한 질문으로 끝난다. 마지막 대사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는 무대 위 등장인물뿐 아니라 책임과 정체성을 집단 속에 흘려보내는 우리 자신을 향한다. 집단행동 뒤에 숨는 개인, 책임의 사라짐, 말의 공허함을 예리하게 포착한 이 작품은 베쓰야쿠를 일본 부조리극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부서진 풍경〉에서 여섯 명의 인물이 벌이는 소동과 극 속에서 언급되는 여섯 명의 집단 자살 사건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시대의 ‘풍경’을 비추는 일종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주체를 상실한 사회가 만들어 낸 환영이자,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기도 하다.
200자평
베쓰야쿠 미노루의 〈부서진 풍경〉(1976)은 일본 소극장 연극이 전위에서 대중성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쓰인 부조리 블랙코미디다. 흐릿한 말투와 익명적 인물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의식 구조를 드러내며 당시 일본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비춘다.
지은이
베쓰야쿠 미노루
일본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아동문학가이다. 만주국 신경(현 중국 장춘)에서 태어나 전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 안보투쟁과 연극 활동을 시작하며, 1961년 스즈키 타다시(鈴木忠志) 등과 극단 자유무대(현 와세다소극장)를 결성, 2007년 《개가 서쪽을 향하면 꼬리는 동쪽》이라는 작품까지 총 130여 편의 희곡을 집필했다.
그는 사무엘 베케트, 카프카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만주국, 태평양전쟁, 안보투쟁에서 민중이 국가로부터 받는 부조리를 강하게 느끼고 그의 작품에 녹여냈다. 극 중 무대 장치는 ‘전봇대 하나’, ‘벤치 하나’가 전부인 듯 단순하고, 등장인물은 종종 ‘남자A, 남자B’처럼 이름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과 고독, 익명화된 인간의 모습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코끼리》, 《성냥팔이 소녀》, 《부서진 풍경》,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의 이야기》, 《왔구나, 고도》 등이 있으며 일본의 부조리극을 확립한 일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기시다쿠니오 희곡상,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상, 요리우리문학상, 기노쿠니야연극상, 아사히상, 요미우리연극대상 등 수상.
옮긴이
정상미
정상미는 일본 극단 분가쿠좌(文学座) 연극연구소 48기 연출부 연수과 수료 후,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그들의 약속〉이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내 마음의 슈퍼맨〉, 〈낙원상가〉, 〈라스트 씨어터 맨〉 등이 공연되었으며 창작 희곡집 《제발, 결혼》(자큰북스, 2019년), 《낙원상가》(평민사, 2021년), 《안녕, 내일》(자큰북스, 2021년)을, 번역서 《조지오웰-침묵의 소리》(지만지드라마, 2024년)를 출간했다. 현재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 4 : 그 일가가 왜 집단 자살을 해야만 했나, 아무도 모릅니다. 다들 진짜 행복해 보였거든요, 뭐가 그렇게 신나서 들떠 있는지 우리끼리 수군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뭐, 때로는, 그런 일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