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세기 초 미국 시문학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재즈 시대의 포잇 걸(poet-girl),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첫 시집이다.
〈부활(Renascence)〉은 시인을 세상에 알린 시다. 시인은 이 시를 1912년 1월에 집필하기 시작해 같은 해 5월에 완성했다. 시 쓰기를 마친 후 곧바로 이 시를 포함한 네 편의 시를 ‘서정시의 해(The Lyric Year)’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로부터 3개월 여 지난 8월의 여름, 빈센트는 지역의 한 유서 깊은 호텔에서 근무 중이던 동생 노르마의 권유로 이 호텔에서 준비한 파티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부활〉을 낭송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채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실어 보낸 이 시는 청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결국 공모전에서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빈센트는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시카고 포스트(Chicago Post)》, 《뉴욕 타임스 북 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세인트루이스 미러(St. Louis Mirror)》 등 유력 언론이 〈부활〉을 호평한 것이다. 그러자 ‘서정시의 해’의 수상작 선정을 비판하는 여론마저 일었다. 그해 겨울, 스무 살의 빈센트는 뉴욕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부활〉은 인간의 존재와 자연, 인간과 신의 관계를 낭만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한 장시(長詩)다. 감각적인 묘사가 매우 풍부하면서도 전통적인 운율과 반복을 사용해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작가들과는 달리 19세기 미국 문학의 전통을 이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는 시적 화자의 내면의 변화와 죽음 체험을 그리며 초월적 통찰을 시도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화자는 산과 바다, 들판과 하늘을 바라보는 감각적 묘사를 통해 자신이 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수평적 시선을 그린다. 이윽고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과 죽음의 수직적 구도로 화자 자신을 이끌고, 이를 통해 자신과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에 다다른다. 마침내 화자는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일종의 정신적 깨달음에 이른다.
〈부활〉만큼 긴 시인 다음의 시 〈사이〉는 〈부활〉과 유사하게 죽음과 삶 사이에서 고뇌하는 화자를 그린다. 뒤이은 또 다른 장시인 〈자살〉의 화자는 삶을 버린 이다. 죽은 연인을 그리는 〈사이〉 뒤에 이어지기 때문에, 〈사이〉에서 애도하고 있는 죽은 연인의 이승에서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이어 젊음의 열정, 실연의 아픔, 죽음과 사랑 같은 주제를 다룬 짧은 서정시가 이어지고, 끝으로 빈센트가 가장 사랑했던 시 형식인 소네트가 이어진다. 이탈리안 소네트 형식의 시 네 편과 셰익스피어 소네트식의 두 편이다. 여섯 편의 소네트 중 마지막 작품에만 제목이 있는데, 프랑스 고전 동화 〈푸른 수염〉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빈센트의 시는 동화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의 시에서 푸른 수염은 더 이상 금기를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라, 혼자만의 공간을 원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녀의 푸른 수염은 자기만의 방, 곧 창작을 위한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이다. 마치 이 시에서 작품은 끝나고 모두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지만, 시 창작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고 빈센트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200자평
1923년 퓰리처상 시 부문 수상자 빈센트 밀레이의 첫 시집이다. 시인의 출세작이자 대표 시 〈부활(Renascence)〉을 담은 이 시집은 새로운 시대와 세대의 감수성 변화를 반영하면서도, 19세기 미국 문학의 초월주의 전통을 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완역으로 선보인다.
지은이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Edna St. Vincent Millay, 1892∼1950)는 메인주의 바닷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노래와 피아노를 배웠고 어머니를 따라 시를 읽었다. 빈센트는 평생 동안 어머니와 많은 양의 편지를 교환했는데, 편지에서 종종 자신이 새로 쓴 시를 소개하며, 어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일찍이 학교에서 글쓰기에 큰 재능을 보여 10대 초반에 아동잡지에 시를 투고하기도 했다. 1906년 열네 살 때 《세인트 니콜라스》에 시 <숲의 나무(Forest Trees)>를 게재했는데, 이 시가 빈센트가 잡지에 게재한 최초의 작품이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1917년 첫 시집 《부활 그리고 다른 시》가 출간된다. 빈센트의 후원자들이 시집 출간에 맞춰서 낭송회 일정을 잡아 주어 스무 곳이 넘는 도시를 방문하며 30회 이상의 낭송회를 열었다. 신문은 그녀를 미국의 포잇 걸(poet-girl)이라고 불렀다. 이후 《엉겅퀴에서 나온 무화과(A Few Figs from Thistles)》(1920), 《또 다른 사월(Second April)》(1921), 그리고 《하프 짜는 여자의 노래(The Ballad of the Harp-Weaver)》(1922)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문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외 시집 《눈 속의 수사슴(The Buck in the Snow and Other Poems)》(1928), 《치명적 인터뷰(Fatal Interview)》(1931), 《이 포도의 와인(Wine from These Grapes)》(1934), 희곡 <아리아 다 카포(Aria Da Capo)>, <한밤중의 대화(Conversation at Midnight)> 등을 발표했다.
빈센트 밀레이는 무엇보다 여성의 몸과 마음의 자유와 독립을 노래한 페미니스트였으며, 동시에 다양한 사회 사건에 참여한 정치시인이기도 했다. 1927년 사코·반제티 사법살인 사건 이후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기로 했다. 또한 미정부의 프로파간다 조직인 전시작가연대(Writer’s War Board)의 활동을 지원했다.
1936년 여름, 자동차 사고가 있었다. 사고의 여파로 빈센트는 피아노를 치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 사고 후유증 때문에 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두문불출하는 날이 많았다. 연인이자 보호자이며 비서 역할까지 도맡았던 남편 유진이 사망한 후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이듬해 1950년 10월 19일, 자택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낙상이었으며, 2층 침대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노트에 미완성인 시가 하나 있었는데, 마지막 세 행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나를 억제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의 슬픔으로 완벽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날이다 누가 죽었든 간에
향년 58세였다.
옮긴이
김영훈
김영훈은 현재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영어영문학과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 대중문화가 주 연구 분야이며, 지금까지 포스트네트워크 시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영문학의 한국화와 한국학의 세계화가 공유하는 영역을 탐사하며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대중문화의 이식과 변이의 역사, 그리고 현대 한국 보수 문화 감수성의 기원으로서의 미국 대중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역서로는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음》, G. 브루스 보이어의 《트루 스타일》, 빈센트 밀레이의 《또 다른 사월》과 《엉겅퀴에 열린 무화과》가 있다. 2023년 가을부터 2024년 봄까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방문교수로 연구했다.
차례
부활
사이
자살
신의 세상
언덕 위의 오후
슬픔
술집
삶의 재
작은 유령
슬픔의 친척
부서짐의 세 노래
수의
꿈
무관심
마녀 아내
병충해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소네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 무한이
나에게 내려와, 내 위에 거했다
무한은 내 비명을 내 안으로 밀어 넣고,
나의 팔을 꺾어 가슴 위로 올리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의 정의를
내 마음에 밀어 넣었다
무한이 내 눈앞에 렌즈를 가져다 대어
움츠러든 나의 눈은 렌즈
너머로, 겹겹이 펼쳐지는
광활함을 보아야 했다
내게 그저 한 마디를 속삭였으나,
그 한 마디는 온 세상의 공기를 먹먹하게 했고
다정한 천체의 수군거림도,
장막 친 하늘의 삐걱거림도,
영원의 째깍거림도,
모두, 내 귀에 그대로 들려왔다
나는 보았고, 들었으며, 마침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영원까지,
모든 것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
-〈부활〉 중에서
2.
그녀는 필요보다 머리칼이 많아,
햇살 아래 서면 나에겐 괴로움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색색의 구슬 목걸이야,
혹은 바다로 이끄는 계단이지
그녀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어떤 일에도 나를 따르지만
그녀는 남자를 위한 존재는 아니야,
나는 그녀를 결코 완전히 가질 수 없을 거야
-〈마녀 아내〉 중에서
3.
내 삶에서 이 방 하나만은 내 것이었지
누구도 나를 완전히 알 수는 없었어
그런데 네가 오늘 밤 이 방의 문턱 너머로
기어 와 나를 이토록 모독하다니,
다시는 네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방은 너의 것, 나는 다른 곳을 찾는다
-〈푸른 수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