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천재 시인 다쿠보쿠의 비운의 소설
다쿠보쿠는 1905년 19세 때 첫 시집 《동경(あこがれ)》을 내며 천재 시인이라 불렸지만 시로 생활을 영위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글을 써서 생활하는 소위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신문이나 상업 잡지 등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소설류였다. 1907년 21세 때,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보고자 홋카이도에 건너가 임시 교원, 신문 기자 등으로 일하며 나름대로 생활의 안정을 찾지만, 문단으로부터 동떨어졌다는 위기감에 1년 만에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상경 후,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소설을 써 약 1개월 사이에 〈비로드(天鵞絨)〉, 〈두 줄기의 피(二筋の血)〉를 포함해 〈기쿠치 군(菊池君)〉, 〈병원의 창문(病院の窓)〉, 〈어머니(母)〉, 〈나의 숙부의 형벌(刑余の叔父)〉 등 여섯 작품 약 300매의 원고를 탈고한다. 이 원고를 팔아 생활의 곤궁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실패한다. 〈비로드〉와 〈두 줄기의 피〉 모두 생전에는 발표되지 못했고, 사후 전집에 수록되어 발표되었다.
비로드
다쿠보쿠는 이 작품에 대해 “시골에서 도망쳐 도쿄로 나와, 3일간 하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자에 대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소설의 배경은 다쿠보쿠의 고향이었던 시부타미다. 원래 마을의 이발사였지만 지금은 도쿄에서 개업해 모든 것이 하이칼라스럽게 변한 겐스케가 마을에 들르자, 오사다와 오야에, 두 처녀는 도시 생활의 꿈에 부푼다. ‘하녀살이를 하면 식사까지 제공되고 한 달에 4엔은 벌 수 있다’는 겐스케의 말에 솔깃하여, 급기야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도쿄로의 가출을 감행한다. 도쿄에서의 하녀살이 첫날, 오사다는 자신의 하녀 방에 깔린 비로드 이불을 덮고서 가출 전날 밤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온 남자친구 우시노스케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비로드 같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당시의 문학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다쿠보쿠의 소설 중에서 “가장 감상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마이 야스코(今井 泰子)]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줄기의 피
한 청년이 유년기에 경험한 슬픈 두 죽음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 죽음은 그의 첫사랑과도 같았던 한 소녀의 죽음이다. 다쿠보쿠는 그의 대표적인 단가집 《한 줌의 모래》에서 “커다란 조끼 모양의 붉은 꽃 / 지금도 눈앞에 선하네 / 여섯 살 때의 첫사랑”이라는 단가를 읊었다. 이 단가에 그려진 “여섯 살 때의 첫사랑”이 〈두 줄기의 피〉의 여자 주인공 후지노와 잘 겹쳐진다. 이 가련한 죽음의 이야기 뒤로, 아기를 안은 거지 여인이 말에 차여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풀숲에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회상하는 이 청년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회의에 휩싸인다. 이러한 청년의 절망적인 심정을 통해 당시 다쿠보쿠가 처해 있던 문학적 성공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엿볼 수 있다.
200자평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편소설집이다. 〈비로드〉와 〈두 줄기의 피〉는 다쿠보쿠가 홋카이도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문학에 매진코자 도쿄로 돌아온 후 1개월 만에 집필한 작품들이다. 생전 미발표작으로 사후 전집에 수록되어 발표되었다.
지은이
이시카와 다쿠보쿠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는 일본의 동북 지역인 이와테현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활발히 시작 활동을 했으나 졸업을 반년 앞두고 중학교를 중퇴해, 학력 사회가 되어 가는 근대 일본 사회에서 불리한 인생길을 걷게 된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쿠보쿠는 문학적 재능을 입신의 기회로 삼고자 시, 문학 서평 등을 분주히 발표한다. 그러나 다쿠보쿠의 아버지가 호토쿠사 주지직에서 파면당하면서, 이후 그는 생활고와 싸우며 문학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05년 19세 때, 시집 《동경》을 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1907년 21세 때, 홋카이도에 건너가 임시 교원, 신문 기자 등으로 일하며 생활인으로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곧 문학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약 1년간의 홋카이도 생활 후 상경길에 오른다. 상경 후,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소설을 썼으나 그의 소설은 팔리지 않았고, 다쿠보쿠는 문학적 좌절과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이에 단가를 수없이 지으며 현실적 고뇌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무렵 쓴 단가들은 후일 그의 대표 가집인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에 수록된다.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여전히 그는 문학적 낭만을 추구했다. 데카당스적인 이중생활의 면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로마자 일기(ロ−マ字日記)〉는 이 무렵 쓴 것이다.
1909년 3월 23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을 위해 도쿄 《아사히 신문》사 교정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생활고와 고부간의 갈등을 참지 못한 아내 세쓰코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다쿠보쿠는 대단한 충격을 받는다.
24세 때인 1910년 초여름, 대역 사건이라 칭하는 사회주의자 탄압 사건 일어나자, 다쿠보쿠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그해 8월, 〈시대 폐쇄의 현상〉을 집필하는데, 이는 메이지 제국주의 사회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당대 최고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그해 12월, 일본 근대 문학사에 그의 이름을 각인한 단가집 《한 줌의 모래》를 간행한다. 대부분 1910년에 쓴 것으로, 도시 생활의 애환을 그린 것과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세의 문학 연구가들은 이 단가집의 단가를 평하며 다쿠보쿠식 단가 또는 생활파 단가라 칭했다.
이듬해 다쿠보쿠는 점점 병약해져 대학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는 가운데 문학적 의지를 보이며 시 노트 〈호루라기와 휘파람(呼子と口笛)〉을 작성한다. 이 시 노트는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으나 다쿠보쿠 생전에 빛을 보진 못했다.
다쿠보쿠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더 이상 집필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1912년 4월 13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옮긴이
윤재석
윤재석은 1964년에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밭대학교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이시가와 다쿠보쿠 소설 〈구름은 천재다〉考−반권력적 텍스트로서〉, 〈石川啄木における伊藤博文暗殺事件−新聞報道資料を中心に〉 등 다수가 있다.
차례
비로드
두 줄기의 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도쿄의 식모살이! 고향에서 생각했을 때에는 매우 화려하고 재미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편지 한 장을 고향에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부모님의 얼굴과 동생들의 목소리, 말, 친구들, 풀베기, 물 긷기, 태어난 고향 마을이 상세히 떠올라 오사다는 살짝 눈물을 머금은 채로,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비로드〉 중에서
2.
‘붉다’라 하면, 아, 그 8월의 염천 아래, 하얀 정강이에 흘러내리던 한 줄기의 피! 그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때마다, 이유도 없이 나는 다시 그 여름 풀숲 속에 쓰러져 있던 여자 거지가 떠오른다. 그러면 곧 또 나는, 행방을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된다. 피를 토한 후, 혼수상태가 되기 전, 말할 수 없는 피로감에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꿈을 꾸다 보니, 이제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친어머니의 얼굴은 더 이상 참된 모습이 아니라, 여름의 풀숲 속에서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어디서 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그 여자 거지의 얼굴과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 줄기의 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