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원시와 문명 사이 ‘감응하는 물질세계’를 그리다
근대 인류학의 창시자에게서 찾은 인류세의 인류학
인류세는 파열되고 뒤섞이는 혼돈의 시대다. 우리는 틈새를 횡단하며 익숙한 풍경을 새로이 읽어야 한다. 근대 인류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의 성취와 한계는 그러한 탐사에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타일러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비교해 인류 문화의 보편 이론을 세우려 했다. 인류의 동일성과 문명의 진보를 상정하며 과학적 탐구에 기반한 ‘문화과학’과 ‘종교과학’을 제안했다. 철 지난 듯한 그 사유 속에는 애니미즘을 비롯해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세계를 사유할 단서가 있다.
이 책은 인류에 대한 총체적 연구의 기틀을 놓은 타일러의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조망한다. 타일러는 인류 문화의 선형적 발달을 명확히 제시하면서도 정체 혹은 퇴보를 논의에 포함하고, ‘원시’ 혹은 ‘야만’을 무시하면서도 인류의 동일성을 제안하며, 애니미즘과 유물론을 대비하면서도 ‘감응하는 물질세계’를 사유하는 유물론적 애니미즘의 여지를 남긴다. 이렇듯 ‘모호하게 흔들리는’ 타일러를 입체적으로 읽는다면 인류세를 비롯한 현재의 관심사에 유용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일러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오늘날의 인간과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어지러운 현상을 조망해 보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
근대 인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영국의 학자다. 대표 저서 ≪원시문화: 신화, 철학, 종교, 언어, 기술, 그리고 관습의 발달에 관한 연구≫(1871)에서 인류의 문화와 종교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며 ‘문화과학’과 ‘종교과학’을 제안했다. 동서고금의 방대한 자료를 비교·분석해 인류 문화의 보편적 법칙을 모색했다. 인류의 정신적 동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으로 나아가는 점진적 진화의 관점을 취했다. 근대 인류학과 종교학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세계 각지의 광범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시한 ‘애니미즘’ 이론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오늘날의 논의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자평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인류 문화의 보편 이론을 세우려 한 근대 인류학자다. 인류의 동일성과 문명의 진보를 상정하며 과학적 탐구에 기반한 ‘문화과학’과 ‘종교과학’을 제안했다. 유물론적 애니미즘을 비롯해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세계를 사유할 단서를 남겼다. 타일러의 성취와 한계를 입체적으로 읽으면서 인류세를 비롯한 현재의 관심사에 유용한 통찰을 발견한다.
지은이
유기쁨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종교생태운동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생태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경계를 횡단하는 애니미즘: ‘인류세’에 타일러 다시 읽기”(2025), “기후위기와 주변부의 귀환: 하늘이 무너질 때 틈에서 솟아나는 것들”(2024), “발 플럼우드의 철학적 애니미즘 연구: 장소에 기반한 유물론적 영성 개념을 중심으로”(2022) 등을 발표했다. 단독 저서로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2023),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2013)가 있고, 공저로 ≪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2020)와 ≪아픔 넘어: 고통의 인문학≫(2019) 등이 있다.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2024), ≪원시문화: 신화, 철학, 종교, 언어, 기술, 그리고 관습의 발달에 관한 연구≫(2018),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경작법과 농경 의례에 관한 연구≫(2012)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차례
근대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초석을 놓다
01 인류
02 문화과학
03 진보
04 야만인과 문명인
05 잔존물
06 종교과학
07 애니미즘
08 영혼
09 유물론적 애니미즘
10 인류세의 인류학
책속으로
타일러가 인간에 대해, 인간의 문화에 대해 제기한 물음들과 스스로 해답을 모색한 과정은 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원시문화≫는 인류 문화의 특성과 전개 과정, 문화와 종교의 관계, 종교의 발달 과정, 인류의 진화 같은 거대한 주제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어 봤음 직한 물음들, 곧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 문화들은 왜 서로 차이를 나타낼까’ 등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_“근대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초석을 놓다” 중에서
타일러는 전근대를 인간과 자연, 초자연의 영역이 뒤섞인 혼동의 시기로 규정하는 한편, 근대를 구별된 체계와 진보의 시대로 선언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세계 내 인간의 자리를 이중적으로 설정한다. 타일러에게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나머지 자연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우월한 지위를 점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바로 이 양가적 설정이 “문화과학”으로서 근대 인류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_“01 인류” 중에서
예를 들어 영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관용구인 “당신을 물었던 개의 털(the hair of the dog that bit you)”은 오늘날 해장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해를 입힌 것이 치료도 할 것이라는 고대 동종 요법의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개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당신을 물었던 개의 털”을 쓰기도 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치료법은 사라졌지만, 그 상징은 언어적 흔적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과거의 맥락이 지워진 채 형식만 지속되는 것이 바로 잔존물이다.
_“05 잔존물”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타일러의 양가적 태도다. 타일러는 한편으로 물체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대하는 태도를 인류의 유아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꿈이나 환시에서 물체의 환영을 본 사람들이 물체의 영혼을 상상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과라고 여기고 이를 옹호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유령이나 귀신을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항상 옷을 입은 모습으로 상상한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물체의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타일러는 물체의 영혼과 관련해서는 “생물학적 원칙에 따라 해석된 감각의 증거”에 충실한 ‘야만인’의 논리가 일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문명인은 인간 영혼의 교리에만 몰두하면서 물체의 영혼을 무시하거나 거부한 탓에 논리적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_“08 영혼” 중에서
인류 문화의 선형적 발달을 명확히 제안하는 듯하면서도 정체 혹은 퇴보의 기간이나 상태를 논의에 포함한다는 점, ‘원시’ 혹은 ‘야만’을 무시하는 듯하면서도 인류의 동일성을 제안한다는 점, 애니미즘과 유물론을 대비하면서도 유물론적 애니미즘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 등 우리는 선명한 진보 서사를 어지럽히는 모호한 지점들을 타일러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단순한 한계라기보다 오히려 탈근대적으로 애니미즘을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적 질서가 아니라 헤테라키(heterarchy)적 연결과 상호작용의 세계를 읽어 낼 수 있다.
_“09 유물론적 애니미즘” 중에서